신라 말기에 창건된 여주 고달사. 폐사된 사연은 비밀에 가려져 있으나 천년의 세월 동안 그 빈터를 지켜온 석조물들에는 아직도 장인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만물이 생동하는 화창한 봄날에 둘러보는 폐사지. 여느 계절의 그것과는 또 다른 묘한 울림이 있다.
서울에서 6번 국도를 타고 양평까지 간 뒤 37번 국도로 갈아타면 길은 여주로 이어진다. 여주 이포나루를 스쳐 대신면에서 88번 지방도를 타면 북내면 방향으로 들어선다. 연분홍 진달래꽃 화사한 시골의 한적한 봄 풍경을 감상하며 고개를 넘으면 왼쪽으로 고래산(543m), 우두산(473m), 옥녀봉(419m) 등 해발 400~500m 높이의 산봉우리들로 둘러싸인 아담한 분지가 눈에 들어온다. 혜목산 고달사(慧目山 高達寺)가 있던 자리다.
고려 초기 원종대사 머물며 전국 제일의 선찰로 떠올라
신라 후기인 764년(신라 경덕왕 23년)에 창건된 고달사는 신라 선종 구산의 하나인 봉림산파의 선찰(禪刹)로서 고달선원으로도 불렸다. 고려 태조 이후 4대 광종 때까지 왕실의 각별한 보호를 받은 원종대사(元宗大師, 868~958년)가 주지로 머물면서 나라에서 관장하는 3대 선원의 하나로서 전국 제일의 선찰이 됐다.
그렇지만 언제 폐사가 됐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안갯속에 가려져 있다. 다만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엔 고달사에 관한 기록이 보이고, 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엔 폐사된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이 사이에 무슨 변고를 당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래도 전성기엔 절터 주변 30리가 전부 고달사 땅이었다고 하니 그 권세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달사지의 석조물들은 매우 빼어난 미학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 '넘치는 힘과 호방한 기상이 분출하는 가운데 화려하고 장엄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는 유물'로 평가받고 있는 국보급이다.
봄볕 가득하면서도 호젓하기만 한 절터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유물은 석불대좌(보물 제8호). 불상은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높이 1.57m) 잘생긴 석불대좌로서의 품격을 인정받고 있다. 상·중·하대와 지대석을 모두 갖춘 사각대좌로 연꽃 조각이 장엄하고, 특히 불상이 안치돼 있던 상대의 윗면은 아주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어 짝을 이루던 불상의 아름다움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 위쪽엔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제6호)가 천년의 세월을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다. 신라의 부도비 형식을 잘 계승한 이 유적에선 고려 초기의 진취적인 기상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거북의 네 발과 발톱 끝은 사실적이어서 금방이라도 땅을 박차고 나갈 듯하며, 용머리를 닮은 귀두는 크고 기이해 몸을 얼어붙게 만든다. 마치 고달사지 수호신 같다. 여기에 얹혀 있던 비신은 경복궁 근정전의 회랑에 진열돼 있다.
가족이 굶어죽는 줄도 모르고 조각에 매달렸다는 장인
고달사지 석조물 중 비교적 온전한 유물은 두개의 부도. 원종대사혜진탑비를 벗어나 절터 뒤쪽의 산길로 100~200m 정도 걸어 오르면 원종대사혜진탑과 고달사지부도를 볼 수 있다. 다행히 산속에 있는 석조물들은 큰 상처를 입지 않아 호방했던 기상을 세밀히 살펴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고려 초기에 제작된 원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은 원종대사의 부도다. 역시 중대석에 새겨진 구름과 용들의 생동감이 돋보여 아름다운 부도로 꼽힌다. 하지만 50m 위쪽 숲속에 자리한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의 조각 수법보다는 한수 아래란 평이다. 고달사지 맨 위쪽 숲속에 자리하고 있는 고달사지부도는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부도 중 가장 크면서도 조각수법이 매우 세련되고 균형이 완벽하게 잡혀있어 제일 아름다운 부도로 평가받는다. 이 부도 앞에 있던 고달사지 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채 오늘도 절터를 지키고 있는 고달사 석조물은 모두 고달(高達)이란 석공이 조성했다고 한다.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는 장인. 그는 불사를 끝낸 뒤 인생의 허무함을 느껴 스스로 머리를 깎았고 훗날 도를 이루어 큰스님이 됐다고 전한다. 고달사라는 절집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고달사지는 현재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이지만 둘러보는 데는 큰 불편함이 없다. 관람 동선을 따라 나무 데크와 안내판을 잘 설치해놓았기 때문이다. 고달사지는 넓지만 답사객이 많지 않아 1시간 정도면 여유로운 봄날의 산책도 덤으로 즐길 수 있다. 2014년엔 고달사지 입구에 전시실을 갖출 예정이라 한다.
여행수첩
●교통 서울→6번 국도→양평→37번 국도→대신면(율촌리)→88번 지방도→고달사지<서울 기준 1시간~1시간30분 소요>
●숙식 여주 이포나루 근처의 천서리는 막국수로 유명한 마을이다. 강계봉진막국수(031-882-8300), 홍원막국수(031-882-8259), 천서리막국수(031-883-9799) 등 막국수를 차리는 식당이 많다. 막국수 6000원, 막국수가 나오기 전에 맛보는 편육은 1접시(3~4인) 1만2000원.
천서리에 파사장여관(031-883-5350), 이포대교 건너의 금사면 이포리에 스위트펜션(031-883-5034), 주록리에 귀담재(031-881-4341), 금사리에 두견새펜션(031-885-6292), 상호리에 녹색농촌체험마을(031-886-4900), 별자리펜션(031-886-9478) 등 펜션형 민박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