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6일 팬택의 박병엽 부회장이 돌연 사의를 표명했다. ‘쉬고 싶다’는 것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기업도 하나의 생명체’라는 그의 발언은 보다 깊은 뜻으로 읽혔다.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졸업을 앞두고 채권단을 움직이기 위한 초강수라는 해석이 쏟아져 나왔다.
아니나다를까 상황은 숨가쁘게 돌아갔다. 박 부회장의 ‘사퇴 배수진’에 움찔한 채권단은 하루만에 팬택의 워크아웃 졸업안에 전격 합의했다. 채권단이 박 부회장의 복귀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소식이 흘러나오며, 그의 복귀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사즉생(死卽生)’ 승부수가 제대로 먹혀 들어간 셈이다.
사진=머니투데이 이동훈 기자
◆ ‘사퇴’ 승부수, 채권단 움직였다.
4년8개월. 지난 2007년 4월 유동성 위기를 맞아 워크아웃에 들어간 팬택은 이로써 올해로 예정된 기한 안에 워크아웃 졸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게 됐다.지난 12월7일 산업은행, 우리은행, 하나은행 등 11개 금융횟로 구성된 팬택 채권단은 팬택의 워크아웃 졸업안에 합의했다.
현재 알려진 팬택의 채권규모는 총 4500억원으로 협약채권 2138억원, 비 협약채권 2362억원. 이중 채권단은 2138억원의 협약채권을 신디케이트론으로 전환한다는 것이 합의안의 골자다. 신디케이트론은 여러 은행이 한 채무자에게 같은 조건으로 돈을 빌려주는 조건부 중장기 대출이다. 이로써 11개 은행이 갖고 있던 채권이 새 대출로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만기가 연장되는 효과를 거두고, 워크아웃 졸업이 가능해진 셈이다. 새마을금고, 신협 등이 보유하고 있는 나머지 2362억원의 비협약채권은 팬택이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할 계획이다. 팬택 측은 향후 매출을 담보로 한 자산 유동화 기업어음을 발행하는 방식 등을 통해 상환하겠다는 의지다.
박 부회장의 사의 표명 하루 만에 채권단이 이토록 적극적으로 움직인 데는 그의 ‘사즉생 결단’이 큰 영향을 미쳤음은 당연하다. 이날 박 부회장은 팬택 지분 10%에 대한 스톡옵션도 함께 포기했다. 내년 3월말까지 일하면 987억원에 상당 하는 스톡옵션을 받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돈 한 푼 받지 않고’ 물러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셈이다. 단, 향후 팬택 매각 시 박 부회장에게 부여된 우선매수청구권은 남겨둬 경영복귀에 대한 여지를 열어놓았다.
실제로 박 부회장이 돌연 사의를 표명하기 전만하더라도 팬택은 채권단과의 갈등설이 심심찮게 제기되던 상황이었다. 워크아웃 졸업을 위해 팬택계열은 자금조달 차원에서 최근 유상증자를 시도했지만 사실상 무산됐다. 대부분 채권단인 주주들이 돈을 더 내놓는 것을 거부한 탓이다. 때문인지 박 부회장 역시 긴급기자회견에서 “금융이 성장하는 토대는 기업이지만 은행이 기업을 경영할 순 없다”는 말로 서운한 감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박 부회장을 포함한 팬택의 임직원들은 기업을 되살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데, 주주들은 기업을 되살리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지 않는다는 데 대한 안타까움이다.
◆ 박병엽의 팬택, 존재감 과시
사실 팬택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박 부회장의 ‘사즉생 결단’이 빛을 발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당장 지난 2007년 워크아웃에 들어갈 때만 해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2006년 팬택은 해외 진출 부진과 국내 금융환경의 악화로 유동성 위기를 맞았다. 당시 박 부회장은 “창업자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더라도 팬택 만큼은 살려야 한다”는 신념으로 4000억원의 지분을 회생자금으로 내놓았다. 박 부회장은 전국 방방곡곡 채권단을 설득한 끝에 99.9%의 동의를 얻어 기사회생의 기회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회사를 되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은 CEO. 박 부회장은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음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 키운 셈이다. 이번에도 후폭풍은 이전과 다르지 않다. 팬택의 임직원들은 “박병엽 없는 팬택은 있을 수 없다”며 술렁이고 있고, 채권단 역시 “팬택을 일군 박 부회장이 복귀해야 CEO리스크가 사라진다”는 이유로 그의 복귀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팬택=박병엽’이라는 신화는 더욱 단단해졌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박 부회장의 향후 거취에 쏠리게 됐다. 일단은 박 부회장이 평소 건강문제 악화 등으로 “쉬고 싶다”는 의견을 자주 피력해 온 것으로 알려져, 당장 복귀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기자회견장에서 그는 “채권단이 붙잡아도 쉬겠다”며 “체력적, 정신적 피로가 누적돼 휴식이 필요하다. 변화의 방점을 찍기 위해 쉬며 에너지를 재충전하겠다”고 의지를 피력했다. 그는 신제품 스마트폰 '베가 레이서'를 준비하던 올 초 심장혈관 수술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당장은 아니더라도 빠른 시일 안에 그가 복귀할 가능성도 높게 점쳐지고 있다. 채권단의 강력한 요구가 있는데다 스톡옵션과 달리 우선매수청구권에 대해서는 포기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우선매수청구권은 워크아웃 졸업 후 팬택의 매각 과정에서 다른 경쟁자보다 우선해서 매수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박 부회장이 누구보다 우선권을 갖고 있는 셈이다. 다만 현재로서는 자금력이 문제다. 박 부회장에게 당장 채권단 지분을 인수할 만한 자금이 부족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박 부회장의 존재감을 재확인한 만큼, 재무 투자자를 찾기가 더 수월해질 수 있다는 전망이다. ‘사퇴’로 죽음을 불사한 박 부회장이 팬택의 ‘새 주인’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업계의 시선이 쏠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