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과 천민 같은 과거의 신분제도가 사라진 오늘날에도 사람들을 '계층'별로 분류하는 新구분법이 있다. 소위 스펙(specification)이다. 출신학교와 자격증, 경력 등에 따라 평가되는 외적조건을 이른다. 한때 유행했던 노래 '아! 대한민국'에는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어"라는 내용이 나오지만, 현실에서는 스펙에 따른 유리 천장이 엄연히 존재한다. 스펙에 따라 취업도, 승진도 큰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최근 '낮은 스펙'의 족쇄를 풀고 사회 중심에 우뚝 선 이들이 있다. <머니위크>는 270호 커버스토리를 통해 전통적으로 사회에서 선호되는 스펙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성공스토리를 쓰고 있는 우리 시대 '스펙파괴' 인물들을 만나봤다. 그리고 그들의 성공 키워드를 짚어보고, 전문가를 통해 스펙이 부족해도 성공하는 방법에 대해 들어봤다.
학벌보다 실력·열정으로 내공 쌓고 최고 자리에 '우뚝'
'스펙 : Specification의 줄임말. 직장을 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학력, 학점, 토익점수 따위를 합한 것을 이르는 말.'
국어사전에 등재된 스펙의 정의다. 하지만 'Specification'의 원뜻은 '설명서, 사양'이다. 자신이 쌓아나가는 '스펙'이 결국 자신을 설명해주는 몇줄 문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스펙이 부질없다면서도 여전히 이 스펙에 울고 웃는다. 취업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은 더 높은 스펙을 쌓기 위해 뛰고, 이미 번듯하게 직장생활을 잘하고 있는 사람들도 채워지지 않는 '스펙'으로 인해 아쉬움을 갖는다.
그래서 스펙이 없는 CEO들은 더욱 인구에 회자된다. 스펙이 아닌 내공을 쌓았기에 그들의 진가는 더욱 빛난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대로 정상의 자리에 오른 CEO를 소개한다.
◆ 박근희 삼성생명 부회장… "스펙이 발목 잡은 적 없다"
지난해 말, 삼성그룹은 사장단 인사에서 박근희 당시 삼성생명 대표이사 사장을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승진시켰다. 2011년 삼성생명 사장으로 부임한 후 1년만의 승진이었다.
박 부회장은 사업전반에 걸친 폭넓은 경영안목과 추진력으로 정평이 난 CEO다. 삼성전관(현 삼성SDI)에 입사해 삼성전자와 삼성카드, 삼성생명 등 삼성그룹 내 핵심 계열사를 두루 거쳤다.
박 부회장은 뛰어난 경영성과 외에 유명한 부분이 또 있다. 바로 지방대 출신이라는 점이다. 충북 청원군 출신의 박 부회장은 청주상고와 청주대학교 상학과를 졸업했다. 소위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이 아님에도 삼성그룹의 금융계 수장 중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오른 것이다. 실제로 삼성생명에서 부회장 직급까지 오른 인물은 배정충 부회장 이후 6년 만이다.
박 부회장은 평소 본인의 '스펙'에도 자부심이 있었다. 해외유수의 대학교는 커녕 국내 명문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지만 "상고와 지방대 출신이라는 점이 한번도 걸림돌이 된 적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모교인 청주대에서 열린 삼성그룹 순회토크쇼 '열정락서'에서도 "스펙보다 각 분야에서 내공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줬다.
☞ 프로필 1953년생/청주대 상학과 졸업/삼성전관 총무 경리과/삼성비서실 재무팀 담당부장/삼성전관 경영지원팀장/삼성캐피탈 대표이사/삼성카드 영업부문 대표이사/삼성그룹 중국본사 사장 및 삼성전자 중국 총괄사장/삼성생명 대표이사 사장/삼성생명 부회장.
◆ 장인수 오비맥주 사장… "나는 순고예요"
장인수 오비맥주 사장이 말하는 '순고'란 '순수 고졸'이란 뜻이다. 다른 CEO가 직장생활을 하며 최고경영자과정이나 야간대학원을 다닌 것과 달리 장 사장의 학력은 순수하게(?) 고졸로 끝나기 때문이다.
장 사장은 대경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 진로에 입사했다. 함께 입사한 동기 80명 중 12명이 고졸출신이었다. 그만큼 당시만 해도 고졸 출신은 흔했다.
그래서 사내에서는 고졸 출신에 대한 명시적인 차별이 없었다. 하지만 고졸 출신은 입사 후 임금이나 승진에서 '은근한' 차별을 받아야 했다. 일례로 인사고과를 잘 받아 함께 승진하더라도 '고졸 주임'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장 사장은 "그런 현실이 가슴 아팠지만 직장생활은 한순간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100미터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기나긴 마라톤과 다름없다"며 스스로 위안했다.
장 사장은 자신이 '순수 고졸'인 것이 오히려 영업에는 득이 되는 면이 많았다고 말한다. 상대방에게 고졸이라고 말하면 거리감 없어지면서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자신을 솔직하게 오픈한 것이 상대방의 마음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젊은 직원들에게 '자신을 포장하지 마라' '학력 등 외적조건 때문에 주눅 들지 마라' '있는 그대로를 보여줘라'라고 강조한다.
장 사장은 자신이 고졸인 것에 주눅 들지 않았지만 아이들 앞에서는 학력이 부끄러웠던적이 있었다. 새학년이 되면 가족관계조사서를 써오라고 하는데 부모 학력난에 차마 '고졸'이라고 쓰지 못하고 '대졸'로 적어보낸 것이다. 나중에서야 아이들에게 고졸임을 털어놓았지만 "왜 학교나 회사에서 부모의 학력까지 적게하는지 모르겠다"며 여전히 의아해한다.
장 사장은 "이런 관행이 알게 모르게 학벌문화를 조장하고 있다"며 오비맥주의 사장으로 취임한 후에는 자신부터 이런 문화를 바꿨다. 입사 시 학력제한과 영어성적 표시난을 폐지한 것. 외국계 회사임에도 영어점수가 필요없는 인사를 선발해 업무역량이 뛰어난 직원을 조건없이 채용할 수 있었다. 장 사장이 강조하는 건 지식이 아니라 지혜다.
지난해 연말 LG전자의 임원인사에서는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 있었다. LG전자 창사이래 처음으로 고졸출신 CEO를 사장직에 임명한 것이다. 그 주인공은 조성진 LG전자 HA사업부 사장(본부장)이다.
조 사장은 용산공고 졸업이 학력의 전부다. 하지만 세탁기 분야에서만큼은 석·박사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전문가다. 조 사장은 LG전자에서 30년간 세탁기만 만든 세탁기 장인이다. LG전자가 세계최고 수준의 세탁기 기술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은 조 사장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 사장은 "세탁기를 만드는 데 중요한 것은 학력이 아니라 최고의 기술을 개발해낼 수 있는 생각과 열정"이라고 강조해왔다. 조 사장은 세탁기에 대한 열정 하나로 연구에 매진했다. 크게 히트를 친 '통돌이세탁기'나 세계 최대용량인 21kg 대형드럼세탁기 등은 모두 그의 작품이다. 최근엔 세탁기의 영역을 한층 넓힌 'LG트롬스타일러'를 세상에 내놓기도 했다.
2001년 LG전자 최초의 고졸 출신 상무로 승진했을 당시 "이 직책이 회사가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는 조 사장. 앞으로 조 사장이 써 나갈 신화가 어디까지일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