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필스너), 바(바이첸), 둥(둥켈). 이 세글자가 수제 맥주의 대명사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2002년, 월드컵 열풍을 타고 모처럼 외국 손님들이 국내에 몰려들기 시작하자 정부는 한가지 고민이 생겼다. 바로 그들이 마시고 즐길 맥주였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국내 맥주산업은 이미 크게 성장했지만 대규모 브랜드 두곳에만 영업허가를 내줬던 터라 맥주의 다양성이 턱없이 부족했다. 미국 등 해외에서 마이크로 브루어리(소형 양조장)들이 활발하게 생겨난 것과 대조적이다.

정부에서는 그간의 규제를 깨고 영업장에서 직접 맥주를 만들어 팔 수 있는 '브루펍'(Brew-pub), 다르게 말해 '하우스 맥줏집'의 영업을 허가해줬다. 수제 맥주에 대한 정보를 다양하게 접하기 힘들었던 시절 브루어들의 선택은 한결같았다.


독일에서 장비를 수입해 독일식 맥주를 만들었다. '필, 바, 둥'으로 표현되는 독일 맥주는 당시의 브루펍들이 반드시 갖춰놓던 3종세트였다. 2002년 문을 연 '옥토버 훼스트'와 '오킴스브로이하우스' 이후로 하우스맥주 전문점 숫자는 150여개까지 늘어났다. 새롭게 맛보는 깊고 풍부한 맥주맛에, 하우스 맥줏집은 연일 손님들로 붐볐다. 하지만 호황은 길지 않았다.



◆"맥주는 맛, 결국 라거로 회귀하죠"

"하우스 맥주를 만들면 기본적인 생산량이라는 게 있거든요. 양을 적게 생산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요. 이걸 다 소비하지 못하면 버려야 하니까 적자가 나는 거죠." 10년 넘게 서울 한남동에서 독일 맥주 전문점 ‘도이칠란트 하우스’를 운영한 정상용 대표의 회고다.

초기 투자비용이 10억원대에 달하는 하우스 맥줏집이 이익을 내려면 영업장 내에서만 맥주를 판매해서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업장 내에서 팔고 남은 분량은 병맥주로 판매할 수 있어야 하는데 어중간하게 풀린 규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수시로 반복되는 위생검사 등의 규제와 높은 세금은 하우스 맥줏집 운영자들의 의욕을 꺾어놓기 일쑤였다. 처음 신고된 재료와 제조법대로만 맥주를 생산해야 하는 규정은 새로운 맛의 맥주가 탄생할 가능성을 막는 장애물이었다. 어느새 하우스 맥줏집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거나 업종을 변경했다.

2010년부터 맥주 관련 세금 제도가 개편되고 소규모 양조장도 맥주를 유통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외국에선 크래프트 맥주 열풍이 차츰 불기 시작했다.


이 바람은 미국에서 불어왔다. 맥주에 대한 열정과 실험 정신으로 무장한 미국의 마이크로 브루어리들이 전세계에서 반응을 얻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뜨는 맥주의 장르도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수제 맥주의 대명사처럼 통용되던 독일 맥주의 영광은 이제 과거의 일이 돼버린 것일까.

"일단 조금씩 맛을 보시고 가장 맛있는 걸 고르시면 제대로 따라드리겠습니다."

도이칠란트 하우스의 정 대표가 거품이 이는 맥주잔 여덟개를 내밀었다. 이 펍은 오로지 독일맥주만 취급한다. '파울라너'와 '아르코'의 헤페바이스(바이에른식 밀맥주), '비트부르거'와 '크롬바커'의 필스너, '에딩어'의 둥켈(독일식 흑맥주) 등 8가지의 맥주를 생맥주로 맛볼 수 있다.

"독일 맥주의 가장 큰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맛이죠. 요즘 뜨는 맥주들을 먹어보면 처음 한두잔은 괜찮은데 금세 질려요. 결국 전세계 사람의 입맛은 비슷하거든요. 현재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맥주는 라거(Lager) 계열이고 그 방면에서 가장 맛있는 맥주는 독일 맥주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이 워낙 변화에 민감하니까 맥주도 유행을 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가장 맛있다고 느끼는 맥주로 회귀할 거라고 봐요."

10년 넘게 독일 맥주만 취급한 이유를 묻자 그는 "독일 친구들이 약간 한국인 같은 측면이 있어요. 처음엔 되게 차갑고 둔해 보이는데 한번 친해지면 시종일관이에요. 내가 독일 맥주를 한달에 100만원어치 팔겠다고 말한 후 장사를 시작했다면 70만~80만원어치만 팔아도 꾸준히 밀어줘요. 더 많이 팔아줄 테니 자기들로 수입업체를 바꿔달라고 다른 데서 요구해도 듣지 않아요. 의리가 있죠. 맥주 자체도 그렇게 꾸준하게 가는 느낌이 있어요. 맥주 순수령이 선포된 게 1516년인데 아직 지키고 있잖아요."



◆독일 맥주 품질 유지한 '맥주 순수령'

라인하이츠게봇(Reinheitsgebot). 우리말로 번역하면 '순수함에 대한 법령'이라는 뜻을 지닌 이 포고문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법조문 중 하나일 것이다. 남부 독일, 바이에른 지역의 영주였던 빌헬름 4세가 발표한 이 법령은 맥주 제조에 물, 보리, 홉(Hop) 이외의 재료 사용을 금한다.

사실 이 법률은 왕실 재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보리에 대해서는 왕실이 전매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보리 수매는 곧 왕실의 수입이었다. 하지만 그런 목적보다 이 법령이 더 오랫동안 강하게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독일 맥주의 품질이다. 그전까지 맥주 제조에 성분이 불분명한 첨가물을 사용하던 관행을 혁파하고 맥주를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음료로 만든 계기가 됐다.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는 법. 맥주 순수령은 독일 맥주가 높은 품질을 유지하는 밑바탕이 됐지만 역설적으로 다양화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기도 했다. 과일과 향신료 등 상상력이 허락하는 한계 안에서 다양한 재료를 시험하는 이웃나라 벨기에와는 달리 독일의 양조자들은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맥주의 제조법에 따라 묵묵히 맥주를 만들고 또 만들었다.

그 결과 독일 맥주는 한가지 일을 오래한 사람 또는 집단만이 가질 수 있는 '달인의 아우라'를 갖게 됐고 맥주 순수령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맛을 내는 맥주의 제조법도 터득하게 됐다.

이태원 초입의 언덕길 위에 있는 '서스티 몽크'는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한잔 걸치기에 딱 알맞은 펍이다. 다른 건물들의 옥상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서 맥주 한잔을 들이켜다 보면 바삐 뛰어다녔던 하루의 고단함이 어느 정도 보상받는 느낌이다.

이곳은 독특하게도 독일 맥주 중 단 한브랜드만으로 구성됐다. 독일에서도 가장 오래된 양조장으로 알려진 바이엔슈테판이 바로 그것이다. 725년 베네딕트파의 수도사들에 의해 설립된 이래 이들은 외국 유수의 맥주 평가 기관에서 밀맥주 부문 1위를 놓치지 않으며 독일 맥주의 권위를 대변하는 대표선수의 역할을 했다.

'서스티 몽크'에서 제공하는 바이엔슈테판의 맥주들은 옥토버페스트 시즌에 마시는 맥주와 동일하게 제조한 '페스트비어', 시그니처 아이템인 밀맥주 '헤페바이스', 일반 독일 맥주보다 두배 강하게 양조한 도펠복 스타일의 '코르비니언' 등 11가지나 된다.

가장 인기 있는 바이첸복(강하게 양조한 밀맥주) 스타일의 '비투스'는 500cc 한잔에 1만4000원. 절대 싸지 않은 가격이지만 펍 안엔 빈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매니저 이재동씨가 도자기로 된 코르비니언 전용 잔을 묵직해 보이는 갈색 맥주로 채우며 말한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 가격 이상의 가치가 있는 한잔이라고 저희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9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