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미지투데이

최근 성폭력 피해자가 올린 국민청원이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받으며 청와대의 답변을 받게 됐다.

청원자는 민사소송 시 피해자의 집주소, 주민번호 등 인적사항이 고스란히 가해자에게 전달된다며 2차피해를 막을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요구했다. 그는 가해자의 보복이 두려워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면서 온라인커뮤니티에 “2019년 8월5일 보복살해 당할 예정”이라는 글까지 남겼다. 

◆"나는 2019년 8월5일 보복살해 당할 예정이다"

지난 4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성범죄피해자의 집주소와 주민번호 등을 가해자에게 보내는 법원을 막아주세요’라는 청원글이 올라왔다.


자신을 24세 여성이라 밝힌 청원인은 2015년 성폭력을 당해 고소를 진행했고 가해자는 징역 4년을 선고받은 뒤 현재 복역 중이라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민사소송을 통해 손해배상 판결을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까무러칠 만한 사실을 알았다. 바로 판결문 등에 자신의 주소, 전화번호 같은 인적사항이 기재돼 가해자에게 송달됐다는 것.

그는 이 사실을 안 뒤 하루하루를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살아간다고 토로했다. 형사소송에서 피해자 인적사항이 보호받아서 민사소송을 진행했는데 피해자 정보가 가해자에게 전달되는 걸 알았다면 소송을 진행하지 않았을 거라고 밝혔다.


핸드폰번호를 10번 넘게 바꾸고 개명도 했지만 이사 갈 형편이 안돼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글쓴이는 검찰, 경찰, 법원, 인권위 등에 도움을 구했지만 실효성 있는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법원에서는 법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말과 함께 “민사소송은 돈이 오가는 문제이기 때문에 원·피고의 인적사항이 정확해야 한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전했다.


청원인은 내년 8월 가해자가 출소한다면서 너무 갑갑하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유서도 미리 써놨다고 고백했다. 자신이 다치는 것도 걱정이지만 가족이 피해를 입는다면 세상이 너무 미울 거 같다며 “도대체 피해자가 왜 이렇게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민사소송법과 민사진행법의 개정이 무조건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형사고소 단계에서는 조서에 실명 대신 가명을 쓰는 등 피해자의 인적사항 보호에 신경을 쓰지만 성폭력 피해자가 민사소송을 하면 실명, 주소가 가해자에게 노출되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승소 판결문으로 재산명시 신청을 하자 피해자의 주민번호 13자리를 재산명시 결정문에 그대로 기재해 가해자에게 노출되는 문제도 있다”며 이런 문제는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원인은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법에서 보장하는 당연한 권리인데 인적사항 노출에 따른 보복범죄의 우려 때문에 손해배상 청구를 포기하는 피해자들이 속출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보장하고 보복범죄 방지를 위해서는 민사소송 및 강제집행을 하더라도 피해자의 인적사항이 판결문, 결정문 및 소장, 상소장, 항고장, 준비서면 부본 등 민사소송, 민사집행의 전 과정에서 노출되지 않도록 민사소송법과 민사집행법을 개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지난 29일 현재 이 국민청원은 23만5387명의 동의를 얻어 청와대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청원인은 지난 18일 온라인커뮤니티에 “저는 2019년 8월5일 보복살해 당할 예정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청원에 동참해달라며 호소하기도 했다. 그는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글에 판결문까지 첨부했다. 

'성범죄피해자의 집주소와 주민번호 등을 가해자에게 보내는 법원을 막아주세요' 국민청원 캡처.

◆인적사항 기재 불가피… '제도 구멍'은 막아야 

이와 관련 법조계 관계자들은 인적사항 기재가 문제라기보다 정보가 노출된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변호사 A씨는 “소장에 주민번호와 주소지를 쓰지 않으면 당사자가 특정되지 않으므로 무조건 기재해야 한다”며 “만약 기재를 안하면 법원에서 보정명령을 내린다”고 말했다.


다만 인적사항 기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가해자에게 노출되는 게 문제라며 이는 현 제도의 구멍이라고 지적했다. 형사소송도 가명을 쓸 수 있지만 피고인이 재판기록을 열람·등사할 수 있는 만큼 결국에는 피해자의 정보가 노출될 수 있다는 것.

‘승소판결문으로 재산명시를 신청했더니 가해자에게 자신의 정보가 노출됐다’는 청원 내용과 관련해서는 채무자의 재산명시를 신청할 경우 “집행력 있는 정본과 강제집행을 개시하는 데 필요한 문서를 붙여야 한다”(민사집행법 61조 2항)고 말했다.

이어 “승소 판결문을 집행권한으로 삼는데 판결문에는 신상정보가 다 들어 있다”며 “제도가 이렇다 보니 어쩔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검찰이나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서 피해자지원을 받는 방법이 있다고 설명했다. 치료비용, 장례비, 생계비 등을 검찰 또는 센터에서 지원받으면 소송담당 법무관이 가해자에게 민사소송을 제기해 해당 금액을 받아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로는 정신적 위자료나 재물손괴로 인한 피해는 보상받을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측은 “치료비, 긴급 생계비, 간병비 등 의료와 관련한 비용만 지원되므로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 재물손괴로 인한 피해 등은 민사소송을 통해 보상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청원인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호소문.

◆민감한 사안, 개인정보 가릴 수 있어… 허술한 처리가 문제

또 다른 변호사 B씨도 “소장 송달 시에는 당연히 변호사 선임이 안됐으니 가해자가 직접 해당 문서를 받는다”며 정보가 노출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국민청원의 내용처럼 민감한 사안의 경우 “보통 다른 주소를 적어서 낸다”고 강조했다. 그는 “송달만 받을 수 있으면 되므로 원고의 실제 주소를 적지 않아도 된다”며 “주민등록번호도 전자소송 접수 시 입력은 하는데 가려지도록 설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에는 승소판결문에 보통 주민등록번호는 안나오고 주소만 나온다”며 “그 외 첨부서류들(주민등록등초본 등)을 내야 하는 경우 민감한 개인정보는 다 가려서 제출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인적사항 노출 때문에 피해자가 2차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있어 소송과정에서 많이 유의한다”면서 “이 경우 변호사가 일처리를 허술히 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은 지난 1월 민사소송에서 피해자의 인적사항이 가해자에게 노출되는 걸 막는 ‘민사소송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으나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일각에서는 원고 인적사항을 비공개로 처리해 송달하려면 재판 내용을 보고 민감한 범죄를 일일이 다 판단해야 하는데 법원의 엄청난 업무량 등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할 때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