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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름 떨치는 정겨운 '소리길'
홍류동·낙화담, 계곡물도 형형색색 단풍빛
가야산 소리길에 늦가을 정취가 물씬했다. 이 고즈넉한 길은 가야산에서 내려오는 급경사의 홍류동 계곡을 따라 해인사까지 이어진다. 가야산은 상왕봉, 칠불봉, 두리봉, 남산 등 1000m 내외의 연봉과 능선이 둘러 있다. 무엇보다 법보종찰 해인사를 품은 산으로 유명하다.
소리길은 언제라도 맑은 물소리가 아름다운 길이다. 가야산 자락에서 발원해 홍류동 계곡을 흐르는 물은 많은 선인의 사연을 품은 소(沼)를 지나고 바위를 휘돌아 나간다. 흐르는 물소리에 세상의 걱정을 잠시 접어둔다. 단풍과 물소리에 흠뻑 빠지는 길이다.
◆소리길, 이름마저 붉은 홍류동
대장경테마파크에서 각사교를 건너면 소리길 입구다. 늦가을, 깊은 산의 아침은 쌀쌀하다. 다리에 서면 가야천과 멀리 그림처럼 펼쳐진 가야산이 잡힌다. 산 주변은 온통 물감을 들인 것처럼 붉게 채색됐다. 단풍으로 물든 것이다.
길은 통나무 둘을 맞대어 대문 모양으로 세운 입구를 통과하면서 시작한다. 붉게 물든 단풍을 만나려면 더 올라야 한다. 계곡과 나란히 한 평지 길을 걸어 갱멱원(更覓源)과 축화천(逐花川)을 지난다. 둘 다 화강암으로 둘러싸인 계곡의 작은 소(沼)다. 또 물이 깊고 경치가 좋다는 공통점이 있다. 갱멱원은 무릉도원을 상상하며 가야산을 바라보는 곳이라 한다. 상상이 넘치는 선인들의 작명법이 재미있다.
2.2㎞를 걸어 가야산 소리길 탐방지원센터에 도착했다. 무릉도원으로 들어간다는 무릉교(武陵橋)를 지나면 본격적인 숲길이다. 여기서부터 붉은 단풍과 계곡을 더 가까이 접할 수 있다. 선인들이 무릉교라 명명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겠다. 내리쬐던 햇볕은 자취를 감추고 선선한 기온에 마음이 청량해진다.
살갗을 간지럽히는 바람에 홍엽은 계곡물로 산산이 낙하한다. 첩첩이 둘러싼 바위 틈새로 거칠게 때론 부드럽게 물을 쏟아내며 홍엽을 밀어낸다. 이른 봄에는 붉은 꽃으로, 늦가을에는 단풍으로 계곡은 온통 붉다. 이름마저 물에 비친 단풍에 온통 붉게 물들었다고 홍류동(紅流洞)이다.
◆고운, 농산정에서 자연과 벗하다
소슬바람에 낙엽이 진다. 겨우내 앙상하던 나뭇가지는 이른 봄날 파릇파릇한 잎을 낸다. 한여름 온갖 비바람을 견디다가 늦가을에 가장 화려하게 치장을 한다. 나고 죽음이 같은 이치이질 않겠는가. 홍엽이 길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북두칠성에 향을 올린다는 칠성대(七星臺)다. 향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는 칠성신앙은 행운과 몸을 지켜주는 효험이 있다고 믿었다. 아마도 이 칠성대가 그런 역할을 했었으리라. 어릴 적 고향집 마당에서 모깃불을 피워놓고 하늘의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온갖 상상을 펼쳤을 때가 떠오른다. 비스듬히 누워있는 와불이 반긴다. 가장 편하게 부담스럽지 않은 모습으로 길손을 반겨주는 친근한 모습이어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한다.
해인사 일주문인 홍류문을 지나 400여m를 가니 농산정(籠山亭)이다. 최치원이 말년에 세상을 멀리하고 이곳에 들어 은거하며 살던 곳이다. 정자 건너편에 제시석(題時石)에 새겨진 그의 시 ‘세상의 시비가 귀에 들릴까 봐, 짐짓 흐르는 물소리로 산을 다 둘렀네’(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에서 ‘농산’(籠山)을 따와 조선의 후학들이 정자 이름을 지었다.
고운 최치원의 눈으로 홍류동 계곡과 단풍을 바라보는 상상에 빠져본다. 단풍은 나무에 걸린 게 진짜인지 아니면 홍류동 저 맑은 물에 비친 게 진짜인지 헷갈린다.
◆절경 아닌 데가 없다
농산정을 지나며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하늘 색은 푸르다 못해 깊은 연못을 닮았다. 언뜻언뜻 비치다가도 환히 열려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광풍뢰(光風瀨)와 취적봉(吹笛峰), 음풍뢰(吟風瀨)는 우거진 나무에 가려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궁금해서 숲을 헤치고 들어가 보고도 싶다. 하지만 나뭇가지와 잎 사이로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달빛에 잠겨있는 연못이라는 제월담(霽月潭)은 눈부시다. 햇볕에 반사된 빛이 한밤의 달을 대신한 모양이다.
낙화담(洛花潭)이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꽃이 떨어진 못일까. 오늘 걷는 소리길 중 가장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가야천 물과 협곡이 함께 빚어낸 최고의 절경이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도 바위를 뚫는다. 장구한 세월 저리 내리치는 물줄기가 깊은 협곡과 연못을 만들었을 것이다. 못 위로 표표히 떨어진 단풍잎이 울긋불긋하다.
낙화담(落花潭)-최동식
어젯밤 풍우에 골짜기가 요란하더니(風雨前宵鬪澗阿, 풍우전소투간아)
못 가득 흐르는 물에 낙화가 많아라(滿潭流水落花多, 만담유수낙화다)
도인도 오히려 정의 뿌리 남아 있어(道人猶有情根在, 도인유유정근재)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은 푸른 물결 더하네(雙淚涓涓添綠波, 쌍누연연첨록파)
◆단풍, 화려함의 절정에서
가야산 소리길의 농익은 단풍을 따라 걸었다. 첩첩 병풍처럼 둘러싸인 단풍의 숲에서 홍류동 계곡은 더 짙게 불타올랐다. 바위 틈새를 돌아 청청히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를 듣고 법보(法寶) 대장경을 만났다.
숲을 거닐며 온몸을 싸안는 청량한 기운과 자연의 소리를 들었다. 이 같은 행복은 걷기여행의 참맛이다. 깊어가는 가을, 마음을 나누는 사람과 함께 걷는 기분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 본 기사는 <머니S> 제621호(2019년 12월3~9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홍류동·낙화담, 계곡물도 형형색색 단풍빛
| 가야산 소리길 단풍.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
소리길은 언제라도 맑은 물소리가 아름다운 길이다. 가야산 자락에서 발원해 홍류동 계곡을 흐르는 물은 많은 선인의 사연을 품은 소(沼)를 지나고 바위를 휘돌아 나간다. 흐르는 물소리에 세상의 걱정을 잠시 접어둔다. 단풍과 물소리에 흠뻑 빠지는 길이다.
◆소리길, 이름마저 붉은 홍류동
| 해인사 일주문인 홍류문.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
길은 통나무 둘을 맞대어 대문 모양으로 세운 입구를 통과하면서 시작한다. 붉게 물든 단풍을 만나려면 더 올라야 한다. 계곡과 나란히 한 평지 길을 걸어 갱멱원(更覓源)과 축화천(逐花川)을 지난다. 둘 다 화강암으로 둘러싸인 계곡의 작은 소(沼)다. 또 물이 깊고 경치가 좋다는 공통점이 있다. 갱멱원은 무릉도원을 상상하며 가야산을 바라보는 곳이라 한다. 상상이 넘치는 선인들의 작명법이 재미있다.
| 소리길의 시작.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
살갗을 간지럽히는 바람에 홍엽은 계곡물로 산산이 낙하한다. 첩첩이 둘러싼 바위 틈새로 거칠게 때론 부드럽게 물을 쏟아내며 홍엽을 밀어낸다. 이른 봄에는 붉은 꽃으로, 늦가을에는 단풍으로 계곡은 온통 붉다. 이름마저 물에 비친 단풍에 온통 붉게 물들었다고 홍류동(紅流洞)이다.
◆고운, 농산정에서 자연과 벗하다
| 해인사의 단풍.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
북두칠성에 향을 올린다는 칠성대(七星臺)다. 향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는 칠성신앙은 행운과 몸을 지켜주는 효험이 있다고 믿었다. 아마도 이 칠성대가 그런 역할을 했었으리라. 어릴 적 고향집 마당에서 모깃불을 피워놓고 하늘의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온갖 상상을 펼쳤을 때가 떠오른다. 비스듬히 누워있는 와불이 반긴다. 가장 편하게 부담스럽지 않은 모습으로 길손을 반겨주는 친근한 모습이어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한다.
| 최치원의 농산정.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
고운 최치원의 눈으로 홍류동 계곡과 단풍을 바라보는 상상에 빠져본다. 단풍은 나무에 걸린 게 진짜인지 아니면 홍류동 저 맑은 물에 비친 게 진짜인지 헷갈린다.
◆절경 아닌 데가 없다
| 제월담.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
궁금해서 숲을 헤치고 들어가 보고도 싶다. 하지만 나뭇가지와 잎 사이로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달빛에 잠겨있는 연못이라는 제월담(霽月潭)은 눈부시다. 햇볕에 반사된 빛이 한밤의 달을 대신한 모양이다.
| 소리길 늦가을 풍광.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
낙화담(落花潭)-최동식
어젯밤 풍우에 골짜기가 요란하더니(風雨前宵鬪澗阿, 풍우전소투간아)
못 가득 흐르는 물에 낙화가 많아라(滿潭流水落花多, 만담유수낙화다)
도인도 오히려 정의 뿌리 남아 있어(道人猶有情根在, 도인유유정근재)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은 푸른 물결 더하네(雙淚涓涓添綠波, 쌍누연연첨록파)
◆단풍, 화려함의 절정에서
| 팔만대장경이 들어있는 모습.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
숲을 거닐며 온몸을 싸안는 청량한 기운과 자연의 소리를 들었다. 이 같은 행복은 걷기여행의 참맛이다. 깊어가는 가을, 마음을 나누는 사람과 함께 걷는 기분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 본 기사는 <머니S> 제621호(2019년 12월3~9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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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박정웅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