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리포트]③확 바뀐 상법에 기업 초비상…없앤다던 배임죄는 그대로
[달라진 상법 매뉴얼]
김성아 기자, 지선우 기자
2,345
공유하기
편집자주
경영의 룰이 바뀌었다. 국회가 8개월 사이 상법을 3차례나 고치면서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가 포함되고, 집중투표제도 도입됐다. 자사주 소각까지 의무화됐다. 새로운 상법에 대해 기업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정리한다.
상장사의 자사주 소각을 의무화한 3차 상법개정안이 5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늦어도 3~4일 내 관보 게재를 통해 공표·시행된다. 소액주주 권리 강화를 골자로 한 1·2차 상법개정안에 이어 3차까지 입법이 완료된 셈이다.
주주들의 권익은 한층 두터워졌지만 기업들은 유례없는 '규제 쓰나미'에 직면했다. 반면 상법 개정의 반대급부로 기업의 경영 족쇄를 풀어줄 '당근책'인 배임죄 폐지 논의는 제자리 걸음하고 있어 기업들의 역동성이 꺾일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 7월 국회 문턱을 넘은 1차 상법개정안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기존 회사에서 회사 및 총주주로 확대 ▲상장사 사외이사의 명칭을 독립이사로 변경 ▲상장사의 경우 사외이사인 감사위원 선임 및 해임 시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 의결권을 합산 3%로 제한하는 이른바 '3%룰' 강화 ▲상장사의 전자주주총회 도입 등을 골자로 한다.
이어 같은해 9월 처리된 2차 상법개정안은 자산총액 2조원 이상 대규모 상장사를 대상으로 한다. 경영진 견제를 위해 ▲분리 선출하는 감사위원 수를 최소 1명에서 2명 이상으로 늘리고 ▲소수 주주가 특정 이사 후보에게 표를 몰아줄 수 있는 집중투표제를 정관으로 배제하지 못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1차 상법개정안의 이사 충실의무 확대는 지난해 7월부터 적용되고 있다. 1차 개정안의 나머지 개정 사항은 1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올해 7월, 2차 상법개정안은 올해 9월부터 차례로 시행된다.
"이사회 지켜라"…정관 고쳐 이사 임기 바꾸는 기업들
이번 상법개정은 주주 권익 강화와 기업 투명성 제고라는 측면에선 큰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재계 전반에는 행동주의 펀드 등의 경영권 위협과 이사진을 겨냥한 소송 리스크가 현실화됐다는 우려가 팽배하다.
특히 1차 상법개정에 따라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이 회사 및 주주로 확대되면서 기업의 주요 의사결정에 대해 요구받는 절차적·내용적 정당성의 수준이 대폭 높아졌다. 이에 기업들은 대주주가 관련된 거래나 소수 주주 이익 침해 우려가 있는 안건에 대해 한층 강화된 심의 절차, '위험 기반 접근'을 도입해 대응하고 있다. 법률·재무적 관점의 객관적 검토가 사후 분쟁의 핵심 방어 수단이 되면서 합병 등 주요 거래 시 법무법인·회계법인 등으로부터 공정성 평가를 받는 외부 자문 관행이 사실상 필수가 됐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들은 내부적으로 컴플라이언스(준법경영) 체계를 강화하고 법률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며 "중장기적으로는 정부와 국회도 기업 경쟁력과 주주 보호를 동시에 고려하는 방향에서 법 제도의 명확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사회 회의록 작성 방식도 크게 달라진다. 안건 설명 자료에는 ▲총주주 및 소수주주에게 미치는 영향 분석 ▲이사별 이해상충 가능성 ▲대안 검토 과정 등이 상세히 담겨야 한다. 형식적인 의사록으로는 이사를 보호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문성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내부 통제를 강화하고 이사회를 전문성 위주로 보강할 필요가 있다"며 "정보에 입각한 결정이 될 수 있도록 이사들에 대한 외부 자문 비용을 지원하고, 이사회 운영의 집합적인 정합성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했다.
집중투표제 도입은 기업들의 가장 큰 골칫거리다. 행동주의 펀드나 적대적 M&A(인수·합병) 세력이 이사회에 진입할 문턱이 크게 낮아졌기 때문이다. 집중투표제는 한번에 선임하는 이사가 많을수록 소소 주주들이 지지하는 특정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기 유리하다. 이에 대응해 기업들이 꺼내든 방어 전략은 '이사 임기 분산'과 '이사회 규모 축소'다.
기업들은 정관을 고쳐 이사들의 임기를 엇갈리게 하는 '시차임기제'를 도입하거나 이사회 정원 상한을 하향 조정하는 등의 방식으로 방어막을 높이고 있다. 매년 선임되는 이사 수를 최소화해 외부 인사의 이사회 진입을 차단하려는 셈법이다.
3%룰을 강화하고 분리 선출 감사위원을 2명 이상으로 확대한 조항 역시 기업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대목이다. 과거에는 이사를 일괄 선출한 뒤 그 가운데서 감사위원을 지정하는 방식이어서 대주주가 의결권을 활용해 충분히 방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법무부 유권해석에 따라 자산 총액 2조원 이상 상장사는 2차 상법개정안 시행일인 오는 9월10일까지 분리 선출 방식으로 감사위원 2명 이상을 둬야 한다. 대주주의 영향력 축소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들은 감사위원회 정원을 늘려 힘의 균형을 맞추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배임죄 폐지 입법은 '지지부진'…정상적 경영 활동 위축 우려
이처럼 상법개정에 따른 기업의 경영 부담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지만, 정작 기업들의 숨통을 틔워줄 규제 완화 조치는 제자리걸음이다. 대표적으로 기업의 경영 부담을 덜어줄 당근책으로 제시됐던 배임죄 폐지 논의도 지지부진하다. 배임죄 폐지 논의는 지난해 7월 이재명 대통령이 "한국에선 기업 경영 활동을 하다가 잘못하면 감옥에 갈 수 있다는 인식 때문에 투자를 망설이는 경우가 있다"고 언급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민주당은 형법상 배임죄에 대해 '경영 판단 면책 원칙'을 명문화하고 상법상 특별배임죄를 폐지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추진키로 뜻을 모았다. 정부와 여당은 해당 법안이 통과되면 고의적인 사익 편취와 정당한 경영 판단이 명확히 구분돼 검찰의 무리한 기소 관행이 줄어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입법 절차는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고 있다. 김현정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최근 "3차 상법개정안과 함께 배임죄 형벌 완화를 처리하려 했으나 법무부의 배임죄 관련 판례 형화 작업이 지연되고 있다"고 전했다.
재계가 배임죄 폐지를 요구하는 것은 배임죄의 적용 범위가 지나치게 광범위해서다. 일례로 현행 형법 제355조 제2항은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 이익을 취하거나 제3자가 이를 취득하게 해 본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를 배임죄로 규정한다. 여기서 '타인의 사무', '임무 위배', '손해' 등의 요건이 추상적이어 정상적인 경영 판단도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돼 왔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상장사 153곳을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84.9%가 "배임죄 기준이 불명확하다"고 답했다.
처벌 수위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무겁다. 한국의 배임죄는 일반·업무상 배임(형법), 특별배임(상법), 그리고 특경법(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배임까지 '3중 처벌' 구조를 띠고 있다. 특히 특경법상 배임 이득액이 50억원 이상이면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해지는데, 이는 형법상 살인죄의 법정형 하한선과 같은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로까지 확대한 1차 상법개정안이 통과되면서 기업들의 위기감이 고조됐다. 그동안 경영진은 사후적으로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대법원 판례(2002도4229 등)로 확립된 경영 판단의 원칙을 방패 삼아 배임죄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합리적 절차를 거쳐 회사에 최대 이익이 된다고 믿고 내린 결정이라면 배임의 고의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가 명시되면서 이 방패는 사실상 무용지물이 됐다. 기업 전체의 장기적 성장을 위한 합리적 결정이었더라도 주가 하락 등 단기적으로 일반 주주의 가치를 훼손했다는 논리만으로 개별 주주들이 배임죄 고발과 형사소송을 남발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사후에 경영 성패가 갈릴 수밖에 없는 대규모 M&A나 신규 투자 등 모험적인 경영 판단이 위축될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해외 주요 국가와 비교할 때 한국 배임죄는 적용 범위가 지나치게 넓고 처벌은 무거워 개편 논의가 시급하다고 제언한다. 정상적인 경영 활동마저 형사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는 낡은 배임죄의 굴레를 벗지 못한다면 기업의 역동성 저하는 불가피하다는 설명이다.
윤동열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은 국제적으로도 보기 드물게 형법상 일반 배임죄에 특경법까지 더해져 형사 처벌이 지나치게 무거운 구조"라며 "미국이나 영국 등 주요 선진국처럼 민사·회사법 책임 중심으로 전환하거나 독일처럼 형사법적 적용을 엄격하게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현실적인 해법으로는 '경영 판단의 원칙'을 법에 명문화하고, 고의적인 사익 편취 행위에 대해서만 예외적으로 형사 처벌을 묻는 방향으로 법 적용 범위를 대폭 축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배임죄가 없고 대신 사기죄 등으로 다스리는데, 경영 판단에 대한 면책 원칙을 강력하게 적용해 이사가 선의를 가지고 내린 결정이라면 설령 회사에 손실을 끼쳤더라도 처벌하지 않는다. 이는 기업가가 사법 리스크의 공포 없이 혁신에 도전할 수 있는 든든한 발판이 된다.
한국과 법 체계가 유사한 독일과 일본 역시 배임죄를 엄격한 기준에 따라 제한적으로만 적용한다. 1532년 '카롤리나 형법'을 통해 세계 최초로 배임죄를 도입한 독일은 제정 당시 공직자만을 대상으로 했으나 나치 시대에 이르러 기업인으로 적용 대상을 확대했다. 하지만 현재 독일은 배임죄 미수범을 처벌하지 않으며 한국처럼 업무상 배임이나 상법상 특별배임으로 가중 처벌하는 규정도 없다. 일본도 자신이나 제3자의 이익을 꾀하거나 회사에 손해를 가하려는 '명확한 가해 목적'이 입증된 경우에만 처벌하고 있다.
<저작권자 ⓒ ‘존중받는 개인, 부강한 대한민국’ 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보도자료 및 기사 제보 ( [email protected] )>
-
김성아 기자
김성아 기자입니다
-
지선우 기자
안녕하세요. 동행미디어시대 지선우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