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데스크]"한 아이의 눈물로 온 세상이 행복할 수 있다면"
권리론 "참정권 박탈당하면 반드시 구제해야"
광장의 요구 담아내는 건 결국 제도권 정치
2030세대 열망 받아내지 못하면 기성 정치권 위기
이상배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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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명의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눈물로 온 인류가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그 아이를 울리는 데 동의하겠는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걸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이 동생 알료샤에게 던진 질문이다. 알료샤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단 한 명의 인간도 다수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짧은 문답은 '공리주의'와 '권리론'의 차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재선거 논란 위에 이 철학적 논쟁이 오버랩된다.
제러미 벤담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의는 전체 구성원의 최대 행복을 추구한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당선자가 바뀌지 않는 한 재선거는 비효율적이고 불필요하다. 수백억 원의 재선거 비용뿐 아니라 정치적 혼란과 행정 공백까지 수반된다. 오세훈 서울시장 취임 이후 재선거가 결정된다면 그는 4선 연속 도전자가 돼 출마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공리주의의 냉정함은 소수 피해자의 권리를 묵살한다는 데 있다. 공리주의자는 한 아이의 눈물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그 선택에 동의한다. 공리주의에선 심지어 노예제도 정당화될 수 있다.
임마누엘 칸트와 존 롤스의 권리론은 다르다. 단 한 명의 유권자라도 부당하게 참정권을 박탈당했다면 반드시 구제받아야 한다. 롤스가 저서 '정의론'에서 설파한 '최소 극대화 원칙'에 따르면 사회는 언제나 가장 불리한 처지에 놓인 이를 최대한 배려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투표용지가 부족해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한 유권자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선 재선거라도 해야 하다는 얘기다.
당위적으론 맞는 얘기지만 현실성은 떨어진다. 현행 법상 재선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투표용지 부족은 재선거 사유가 아니다. 선거가 무효화되려면 선거 결과가 바뀔 정도의 중대한 결함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개인의 권리가 중요해도 법치주의를 포기할 수는 없다. 재선거를 하려면 국회가 법을 바꾸거나 특별법을 만들어 소급 적용해야 한다. 광장의 요구를 담아내는 것이 결국 제도권 정치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2030세대가 주도한 잠실 시위에서 부실선거는 트리거였을 뿐이다. 집값 급등과 삼성전자 성과급 등에 따른 자산 격차, 미래 세대에 전가된 연금·재정 부담 등에 대한 분노가 터진 결과다. 기성 정치권이 자신들의 요구를 방기하는 데 따른 정치적 무력감도 한몫했다.
만약 여의도 정치권이 앞으로도 청년들을 위한 실질적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면 2030이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시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프랑스의 1968년 반(反)권위주의 혁명을 이끈 이른바 68세대는 지도자 다니엘 콩방디를 중심으로 정치세력화에 성공, 프랑스와 독일에서 녹색당을 창당했다.
다만 한국에서 청년 세대의 정치세력화가 가능하려면 소선거구제 등 넘어야 할 장벽이 적지 않다. 독자적 세력화가 어렵다면 기성 정당 차원에서 청년에 대한 공천 확대 등 2030이 정치권에 들어올 문을 넓혀주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위기란,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런 권력 공백 상태에선 매우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난다." 이탈리아의 좌파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파시스트 정권의 감옥에서 쓴 '옥중수고'의 한 대목이다.
2030은 기성 세대 중심의 제도권 정치권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다고 호소한다. 대신 광장에서 비로소 정치적 효능감을 느낀다. 청년들이 현실의 모순을 감내하고 분노를 속으로 싶어 삼키는 세상은 끝났다. 거리로 나온 2030세대의 열망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기성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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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배 부국장
정치경제부장입니다. △2002년 서울대 경제학부 졸업 △2011년 미국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MBA) 졸업 △2002년 머니투데이 입사 △청와대, 국회, 검찰 및 법원, 기재부, 산자부, 공정위, 대기업, 거래소 및 증권사, IT 업계 등 출입 △2019∼2020년 뉴욕특파원 △2021∼2022년 경제부장 △2023년∼ 정치부장 △저서: '리더의 자격'(북투데이), '앞으로 5년, 결정적 미래'(비즈니스북스·공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