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죽은 건 염려마라. 내 안 이를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둥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깃한 그 내움새에 나는 땅이 꺼지듯이 왼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 <동백꽃> 중에서
소설 <동백꽃> <봄봄> 등으로 유명한 김유정이 태어나고 자란 실레마을은 가을에 가야 제 맛이다. 누런 가을들판과 마을을 둘러싼 금병산이 어울려 여유롭고 낭만적인 시골 풍경을 만든다.
김유정은 1908년 실레마을에서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난 그는 휘문고보에 진학하면서 문학에 심취하게 된다.
1929년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에 입학했지만 1년도 못 다니고 중퇴했다. 집안 형편이 극도로 나빠져서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자퇴서를 낸 뒤 고향인 실레마을로 돌아왔다.
1931년 고향에 내려온 그는 1년 정도 휴양을 한 뒤 몸이 좋아지자 야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한글을 가르쳤다. 그 이후에는 글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는 야학 이름을 농우회로 짓고 노름과 술에 찌든 농촌 사람들의 생활을 개선하고 문맹자들에게 한글을 깨치는데 앞장섰다. 야학은 나중에 간이학교로 인가를 받게 되고 나중에는 금병의숙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조카인 김영수 등과 함께 운영하게 된다. 그러나 1933년 금병의숙이 화재를 입어 다시 서울로 올라오면서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1935년 <소낙비>로 조선일보를 통해 등단했다.
그리고 1937년에 그는 죽게 된다. 5년 밖에 안 되는 작가생활 동안에 그는 30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어림잡아 두 달에 한 편 꼴로 글을 지어냈다. 가난과 원고지와 그를 괴롭히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그는 치열하게 작품 활동에 몰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1937년 3월 29일 새벽 다섯째 누이가 살던 경기도 광주에서 죽는다. 시신은 서대문밖 화장터에서 한줌의 재로 남아 한강 물에 뿌려졌다.
“이 자식아, 일 허다 말면 누굴 망해 놀 속셈이냐. 이 대가릴 까 놀 자식!”
우리 장인님은 약이 오르면 이렇게 손버릇이 아주 못됐다. 또 사위에게 이 자식 저 자식 하는 이놈의 장인은 어디 있느냐. 오죽해야 우리동리에서 누굴 물론하고 그에게 욕을 안 먹는 사람은 명이 짜르다 한다. 조그만 아이들까지도 그를 돌아세놓고 욕필이(본 이름이 봉필이니까) 욕필이, 하고 손가락질을 할만치 두루 인심을 잃었다. … 장인님은 더 약이 바짝 올라서 지게막대기로 내 어깨를 그냥 나려갈겼다. 정신이 다 아찔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때엔 나도 온몸에 약이 올랐다. 이 녀석의 장인님을, 하고 눈에서 불이 퍽 나서 그 아래밭 있는 넝알로 그대로 떼밀어 굴러버렸다. 기어오르면 굴리고 굴리면 기어오르고 이러길 한 너덧 번을 하면 그럴 적마다 “부려만 먹구 웨 성례 안하지유” -<봄·봄> 중에서-
소설 <봄·봄>에서도 보이듯이 김유정은 무지한 농촌 사람들, 사회적으로 하층에 속하는 서민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장인과 멱살을 잡으며 이놈 저놈 싸우는 데릴사위의 모습을 질펀하면서도 해학적인 욕과 함께 그려내는 그의 펜 끝은 실제보다 더 생동감 있는, 살아 있는 인물을 만들게 된다.
김유정 기념전시관과 김유정 동상
김유정은 마을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메모해 두었다가 소설에 쓰는 것은 물론 마을 전체가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배경 무대가 된다.
그가 발표한 30작품 가운데 반 이상이 그와 관련된 사람이나 자연이 나온다. 집안이 몰락하며 가난에 쪼들리게 되면서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된 가족과 자신의 이야기를 그린 <형>이나 <따라지>, 금광에 덤벼들었다가 실패한 경험을 엮은 <금 따는 콩밭> 등이 그렇다. 이 밖에 잘 알려진 <동백꽃>이나 <봄·봄>도 그렇다.
소설 <동백꽃>의 배경이 된 곳은 김유정 문학촌 생가 맞은편 산에 있는 산국농장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동백꽃은 노랗다. 표준어 및 학술명으로 생강나무라 하는데 강원도 지방에서는 동백꽃, 동박꽃, 개동백으로 부른다. 노란 꽃잎이 산수유처럼 가닥이 나 있고, 머릿기름이 귀했던 옛날에는 이 동백꽃나무 열매를 따서 기름을 짜고 머릿기름으로 사용했다. 이 기름은 남정네로부터 춘심을 자아낸다고 해서 당시 여자들은 동백꽃이 사랑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했다.
김유정 생가
김유정역은 남춘천역 바로 전 역인데, 2004년까지만 해도 이름이 신남역이었다. 그해 가을 김유정역으로 바뀌었다. 역이 있는 마을에서 김유정이 태어나고 자랐다. 그래서 김유정역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예전에는 경춘선 기차의 낭만이 흐르던 곳인데 요즘은 전철로 바뀌어 낭만이 예전 만 못하다. 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마음 설레는 가을이라면 이런 문학기행 한 번 떠나볼 만하겠다. 가을 시골풍경에 걸음도 느려진다. 역에서 김유정 생가까지 느린 걸음으로 5분 정도면 충분하다.
김유정 생가는 2002년에 복원했다. 기념관과 동상, 생가와 정자마당, 장독대 등이 있다. 사람이 상주하지 않지만 낮에는 사람이 산다. 한 개의 방에 서재를 만들었다. 선들바람 통하는 툇마루 한쪽에서 문학교실이 열린다. 그렇게라도 사람 입김이 서리니까 집은 어느 정도 윤기가 돈다.
생가는 ‘ㅁ’자 형태다. 벽이 울이고 방이 집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다. 마당은 갇힌 것 같으면서도 열려있다. 네모반듯한 마당 그 모양으로 지붕과 지붕 사이에 하늘을 담은 마당이 있다. 툇마루에 앉아 위를 올려다보면 하늘을 담은 마당이 초가지붕에 걸려있다. 그 속에는 늘 푸른 나무가 서있고, 구름이 박혀 있고, 해와 달이 시간을 바꿔가며 금빛 은빛 가루를 뿌린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면 그때는 바람도 그 하늘 마당에 일부가 되는 순간이다. 초가 마당이 가장 화려할 때는 햇볕 쏟아지는 오전이다. 그때 햇볕은 무엇인가를 포근히 감싸기보다 폭포수처럼 내리꽂히기 때문에 ‘햇살’이라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마당에서 반사된 햇살의 조각들이 일 년 내내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처마 밑이며 서까래까지 비춘다. 활기와 아늑함이 함께 깃드는 시간이다. 김유정 생가에서 하늘 담은 마당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논두렁 같은 골목길에서 발견한 주막집 터
생가와 전시관을 둘러보고 실레마을 지도를 얻어서 마을로 나선다. 관광지처럼 개발된 곳 하나 없는 순박한 시골풍경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유혹한다.
누렇게 익어 고개 숙인 벼가 가을 햇살을 받아 빛난다. 마을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돌담이 집 안팎을 나누고 있지만 허리춤에도 못 미치는 높이에 안과 밖이 하나다. 게다가 돌담은 곳곳이 무너져 경계를 구분 짓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나처럼 이곳을 찾는 여행자에게 오래된 시골마을 풍경을 선물하는 것이다.
호박넝쿨이 굴뚝까지 타고 오른 오래된 집은 사람 발길 떠난 지 오래다. 햇살이 논둑길 같은 골목길까지 내려와 길을 안내했다. 그곳에는 작은 표지판이 있었다. 김유정이 드나들었던 주막집이라는 안내판이었다.
이곳은 김유정이 자주 들러 ‘코다리찌개’ 안주로 술을 먹던 곳이다. 읍내 학생들이 시비를 걸어와 싸움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읍내 학생들이 버리고 도망친 자전거가 50여 대나 됐다고 한다.
<봄·봄>의 봉필영감 집터 또한 그대로 남아 있다. 배참봉댁 마름으로 나오는 김봉필은 실레마을에서 욕필이로 통했던 실존인물이다. 그는 당시 딸만 여럿 낳아 데릴사위를 들여 부려먹기도 하고, 금병산 산림감시원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두루 인심을 잃었다. 점순이와 성례는 시켜주지 않고 일만 부리는 장인과 주인공이 드잡이 하던 곳이다.
<봄·봄>은 주인공뿐 아니라 보조인물들도 전부 실존인물이다. 작품에 나오는 봉필(또는 욕을 잘한다고 해서 욕필이라고도 함)은 본명이 김종필이었으며 그 딸인 여주인공 점순이의 이름은 김씨만이었다. 또 봉필의 데릴사위로 나오는 나(머슴)는 최순일이란 사람이었다.
김유정이 한들 주막에서 술 한 잔 걸치고 백두고개(박두고개)를 넘어오다가 김씨만(작품 속 점순이)과 혼례를 시켜주지 않는다며 장인인 김종필(작품 속 봉필)과 최순일(작품 속 나)이 싸우는 장면을 보고 메모해 두었다가 <봄·봄>의 한 장면에 이용했던 것이다.
<산골나그네>에 나오는 덕돌네 주막도 실제로 있었다. 소설에서 ‘처음 보는 아낙네가 마루 끝에 와 섰다. 달빛에 비끼어 검붉은 얼굴이 해쓱하다. 추운 모양이다. 그는 한손으로 머리에 둘렀던 왜수건을 벗어들고는 다른 손으로 흩어진 머리칼을 씨담어 올리며 수집은 듯이 주뼛주뼛한다. “저어 하룻밤만 드새고 가게 해주세유.” 남정네도 아닌데 이 밤중에 웬일인가, 맨발에 짚신짝으로…’라고 말하고 있는 그곳은 실제로 김유정이 팔미천에서 목욕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자주 들른 주막이다. 김유정은 우마차길 옆 덕돌네 주막에서 덕돌 어멈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김유정 생가 앞에는 움막을 짓고 야학을 하던 곳이 있다. 움막에 불이 났을 때 김유정이 야학 아이들을 구해낸 일화도 유명하다.
이후 금병의숙은 현재의 금병의숙 터로 옮겼다. 지금 금병의숙 터에는 김유정 기적비와 금병의숙을 세운 기념으로 심은 나무가 있다. 김유정 기적비(紀績碑)는 김유정 40주기인 1978년 3월29일 세워졌다. 비석은 펜촉 모양으로 높이 2m, 너비 2.3m의 자연석이다. 비석 앞면 글씨는 작가 김동리가 휘호했다.
한들마을에 남아 있는 옛날 공동 빨래터
가로수 단풍 아래 빨간 우체통
실레마을을 나와 도로를 따라 한들마을로 걸어갔다. 한들마을은 김유정이 박두고개를 넘어 팔미천에서 멱을 감고 주막에 들러 술을 마시던 곳이다.
한들마을은 이름처럼 넓은 들판을 품에 안은 넉넉한 마을이었다. 누렇게 익은 벼가 바람에 넘실대며 일렁이는 모습이 이름 그대로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경운기를 고치고 있는 아저씨가 눈에 띄었다. 아저씨에게 옛날 김유정 얘기며, 한들주막과 팔미천 얘기를 여쭤보았다. 얼굴에 골 깊은 주름 가득한 시골아저씨도 한들주막은 물론 김유정의 실제 생활 이야기도 알고 있었다.
팔미천은 가을색을 품고 있었다. 키 큰 가로수 갈색 단풍이 냇물에 그림자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냇물은 자갈과 모래가 섞인 백사장으로 넘실댄다.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가에 앉았다. 납작한 돌을 골라 물수제비를 떴다. 돌멩이가 스치고 지나간 수면 위로 여러 개의 동심원이 겹쳐지며 물결이 인다. 물위에 그림자로 비치던 가로수 단풍도 흔들린다.
담배 한 대 꺼내 물었다. 아마 김유정도 오늘 같은 가을이라면 이곳에 앉아 물수제비를 뜨고 담배 한 대에 상념에 잠겼으리라.
팔미천에서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오후의 햇살 같은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김유정, 그는 죽었지만 그의 고향 실레마을에서 완전하게 살아있었다. 김유정 문학기행을 마치고 돌아 나오는 길, 가로수 갈잎 단풍 아래 빨간 우체통이 보였다. 갑자기 누군가에게 엽서를 쓰고 싶어졌다.
보내는 사람을 쓰는 줄에는 ‘여행자’라고만 적었다. 그리고는 받는 사람 란에 누구의 이름을 쓸까 고민했다. 한때 문학을 나누던 친구들도 생각나고, 사랑하는 여인도 스쳐지나갔다. 아이들에게 쓸까도 생각했지만 어느 누구의 이름에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받는 사람을 쓰는 줄을 빈 칸으로 남겨 놓고 실레마을 여행기를 간단히 적었다. 부치지 못한 엽서는 김유정역 어디쯤에서 해마다 가을이면 낙엽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여행정보]
<길안내>
자가용
서울 - 청평 - 가평 - 강촌 - 신동면 김유정역 - 김유정 문학촌
대중교통
망우역에서 출발하는 경춘선을 타고 김유정역에서 내리면 된다.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중앙선을 타고 망우역에서 경춘선 전철로 갈아타도 된다.(김유정역에 정차하지 않는 전철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남춘천역에서 내려서 김유정역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면 된다. 시내버스가 많지 않기 때문에 택시를 타는 것도 좋다. 남춘천역에서 김유정역까지는 약 6~7km 거리다) 김유정역에서 실레마을까지 걸어서 4~5분 정도 걸린다.
<음식>
김유정문학촌에서 춘천시내 명동 닭갈비 골목까지 약 8~9km 거리다. 택시를 타고 명동 닭갈비 골목에 도착. 그 골목에 닭갈비집이 많은 데 개인적으로 중앙닭갈비가 입맛에 맞는다. 뼈 없는 닭발도 맛있지만 닭갈비는 뼈 있는 것을 먹어야 먹은 것 같다.
<숙박>
실레마을에는 숙박시설이 없다. 춘천시내 모텔, 집다리골휴양림, 강촌, 소양호 주변 등 민박.
<김유정문학촌 이용안내>
생가, 외양간, 디딜방앗간, 휴게정, 장독대, 우물, 동상, 전시관 등이 있다. 입장시간은 동절기 09:30~17:00, 하절기 : 09:00~18:00이며 매주 월요일과 1월1일, 명절 당일 휴관한다. 문의 : 033-261-4650
<저작권자 © ‘존중받는 개인, 부강한 대한민국’ 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