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디자인은 기업을 살릴 수도, 망하게 할 수도 있는 요소다."


이안 칼럼 재규어 디자인 총괄 디렉터의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만의 생각이 아니다. 자동차업계는 언제나 디자인을 강조한다. 때로는 ‘심장’이라고 볼 수 있는 파워트레인보다 더 강조되는 부분이 디자인이다.

냉장고·TV·세탁기에도 디자인 감성이 강조되는 시기다. 그래서 인류의 가장 ‘감성적인 기계’로 꼽히는 자동차 디자인에 완성차기업의 흥망이 달렸다는 이 말은 어쩌면 당연히 여겨진다.


디자인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자동차 디자이너가 전면에 나서는 일이 잦아졌다. 르노삼성은 앞서 SM6 공개행사에서 앤서니 로 르노삼성 외관 디자인 총괄 부사장과 성주완 르노디자인아시아 SM6 디자인프로젝트 담당을 전면에 내세우기도 했다.


/사진=임한별 기자

◆이안 칼럼과 피터 슈라이어
지난달 25일에는 스타 디자이너 이안 칼럼이 방한해 국내시장에 재규어 신형 XJ를 직접 소개했다. 그가 한국을 찾아온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나라 자동차시장의 관심을 XJ에 모으기 위해서다.

이안 칼럼 급의 디자이너가 직접 해외시장, 그것도 아시아 국가를 찾아 신차발표를 한 것은 이례적이다. 이안 칼럼은 피터 슈라이어 현대기아차 디자인 총괄 사장, 크리스 뱅글 전 BMW 총괄디자이너와 함께 이른바 ‘세계 3대 자동차디자이너’로 손꼽힌다. 크리스 뱅글이 BMW를 떠났고 폭스바겐 디자인을 총괄하던 월터 드 실바가 은퇴를 선언한 상황에서 이 두명이 현재 독보적인 영향력을 가졌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없다.

이안 칼럼은 XJ를 소개하며 “한국은 XJ가 네번째로 많이 판매되는 국가”라며 “한국 소비자들은 재규어 디자인 철학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몇 년간 수입차시장이 엄청나게 커진 한국은 유수의 럭셔리 브랜드들이 ‘초집중’하는 시장이 됐다. 유독 고급차 판매량이 많기 때문이다. 지난해 국내서 판매된 수입차가 24만3900대 수준인데, 이 중 벤츠 S클래스 판매량이 1만대를 넘어서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벤츠 S클래스가 연간 1만대 이상 판매되는 나라는 중국과 미국에 이어 한국이 세번째다. BMW 7시리즈도 전세계에서 네번째로 많이 팔린다.

재규어의 플래그십 세단인 XJ는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419대가 팔렸다. S클래스의 4%에 불과하지만 S클래스·7시리즈와 경쟁상대가 되는 것만으로 판매볼륨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의 이번 방문이 더욱 주목받은 이유는 영국 왕립 예술대학 선후배 사이이자 라이벌인 피터 슈라이어와의 ‘투샷’에 있다. 그들이 직접 만난 것은 아니지만 XJ 출시행사 다음날에는 기아차의 K7 출시행사가 이어졌고 이 자리에는 피터 슈라이어가 앞장섰다. 이 둘은 서로에 대한 언급을 자제했지만 두 ‘거장’이 제시한 디자인 키워드는 일맥상통했다.


이안 칼럼. /사진=임한별 기자
피터 슈라이어. /사진=임한별 기자

◆ 디자인 = 브랜드 정체성
“전통을 계승하되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닌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변화를 추구하되 이것이 ‘재규어’인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이안 칼럼)

“차량 어느 면을 봐도 ‘올 뉴 K7’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타이거 노즈 그릴 등 시그니처 디자인을 유지하면서도 계속 진화할 것이다.” (피터 슈라이어)

두 거장이 각각의 장소에서 말한 이 두 문장은 결국 디자인과 브랜드 정체성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의미다. 이들이 업계에서 독보적인 영향력을 인정받는 것 또한 이런 이유에서다. 개별모델에 심미적 아름다움을 첨가하는 것도 부정할 순 없지만 이들은 디자인만으로 ‘브랜드 정체성’을 재창조한 주인공이다. 그들의 손길로 잘 다듬어진 브랜드의 정체성은 그 자체로 최고의 마케팅이 됐다.

피터 슈라이어의 대표작은 1998년 출시된 1세대 아우디 TT다. 아직도 아우디 브랜드의 ‘디자인 혁신’의 아이콘으로 회자되는 모델이다. 개별모델 판매량으로 끼친 영향보다도 정체됐던 아우디의 디자인 정체성을 확립했다는 의미가 더 크다.

정의선 당시 기아자동차 사장의 적극적인 구애로 기아차에 온 뒤로 해낸 성과도 결국 ‘정체성 확립’이다. 중구난방이었던 기아차의 디자인에 ‘호랑이코 그릴’로 대표되는 기아차의 시그니처를 만들어냈고 이어 현대차까지 디자인을 맡았다. 현대차 전반에 적용된 디자인 아이덴티티 ‘플루이딕스컬프처 2.0’ 또한 절반은 그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재규어에서 이안 칼럼의 업적 또한 마찬가지다. 1999년부터 재규어 디자인 총괄 디렉터 직을 맡고 있는 이안 칼럼은 현 세대 XE·XF·XJ·F타입 디자인을 총괄 지휘하며 ‘전통’에 매몰돼 정체됐던 재규어 브랜드에 새로운 디자인 언어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과감한 변화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의 면모는 이어진 질문에서 잘 드러났다. 재규어를 상징하는 동그란 4개의 헤드램프를 포기한 이유에 대해 그는 "4개의 헤드라이트 역시 당시 시대의 발전에 대한 부응이었다"며 "기술이 진보했다면 전통도 이에 따라 재해석돼야 한다“고 말했다.

시기적으로 XJ와 K7이 비교됐지만 앞으로 펼쳐질 두 거장의 자존심 대결은 이제 막 럭셔리 브랜드로 출범한 제네시스와 전통을 가진 브랜드 재규어의 경쟁으로 확대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경쟁의 핵심 중 하나는 한국시장이다.

단순한 판매량 비교가 아니라 이들이 어떻게 브랜드를 일궈나갈 지 주목해야 한다. 이안 칼럼은 재규어의 전통을, 피터 슈라이어는 현대차의 전폭적 지지를 가졌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추석합본호(제402호·제40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