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한송이 핀 것을 경이롭게 열매 하나 익는 것을 아름답게 보는 마음이 있다면 삶은 결코 초라하거나 허무하지 않을 것이다." '느림의 미학' 완도 청산도 상서마을 옛 돌담길 언저리에서 볼 수 있는 글귀다. '빠름은 반칙=청산도'. 달팽이를 닮아서 달팽이섬이 아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살자는 의미의 청산도.
풍경에 취해 발걸음이 느려진다는 슬로길을 체험하기 위해 지난 22일 아침 완도여객선터미널에서 청산도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7월 한여름 날씨 답지 않은 서늘한 바닷바람과 쾌청한 날씨가 청산도를 향하는 뱃길 너머로 아기자기한 섬들을 구경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완도항을 출발한지 45분이 지날 쯤 청산도 도청부두에 도착했다. 7년째 전라남도 문화해설사로 활동 중인 백련암의 도현스님이 청산도 안내를 맡았다. 모두 11개 코스로 나뉜 슬로길 총 42.195km 중 1코스인 미항길-동구정길-서편제길-화랑포길로 첫발을 내딛었다. 청산도 관문인 도청항부터 선창(부둣가)을 따라 걷는 미항길은 청산도 농특산물이 한데 모이는 곳으로 삶의 활기가 넘쳐나는 길이라고 한다.



특히 '서편제길'은 한국영화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동원한 '서편제'의 명장면 중 주인공 송화와 유봉, 그리고 동호 등 주인공 세 사람이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덩실 덩실 어깨춤을 추고 구성지게 진도아리랑을 목청껏 내지르며 구불구불한 돌담길을 걷었던 영화 속 장면이 머리 속을 스쳐갔다. 이 장면은 당초 계획보다 배 이상인 5분 30초의 롱테이크로 찍어 화제가 됐다. 황톳길과 끝없이 이어진 돌담길이 임권택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모양이다.

서편제길 언덕 위에는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이 한 폭의 그림처럼 자리 잡고 있다. 봄에는 노란 유채꽃과 파란 청보리로,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길을 수놓는다고 한다. 세트장 바로 아래에는 초분(草墳)이 있는데 일종의 풀무덤으로 섬지역에서 행해지던 장례문화가 재현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범바위에서 기(氣) 받아 가세요"



5코스 권덕리에서 청계리로 향하는 길을 오르면 옛날 청산도에 살던 호랑이가 바위를 향해 포효했는데 이 바위에서 울리는 소리가 더 커 호랑이가 도망을 갔다는 전설의 범바위를 만날 수 있다. "범바위에서 기(氣) 받아 가세요"라는 도현 스님의 말이 언능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이 범 바위에는 자철석 성분이 많아 강력한 자기장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항상 북쪽을 가르켜야 할 나침반이 '빙그르' 돌며 자리를 잡지 못하고 기능을 상실한다는 것. 도현스님은 "그래서 해도(海圖)에는 이 지역이 '자기장 이상 지역'으로 표시돼 있다"고 말했다. 또한 범바위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동물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원숭이, 사자 얼굴, 코를 늘어뜨린 코끼리도 눈에 담을 수 있다. 최근에는 제주도에서 온 한 관광객이 해마와 닮은 모습을 발견했다고 도현 스님은 귀뜸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범바위 바로 위에 달팽이 형상을 한 전망대가 위치해 있는데 관광객들의 허기를 달랠 수 있도록 휴게실이 마련돼 있다. 두툼한 해물파전과 막걸리 따끈한 바다 고동은 출출함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바로 앞 우체통은 편지를 써서 부치면 1년 후에 도착한다. 슬로시티 청산도의 의미를 담고 있다.



허기를 달래기에 부족했다면 청산도 슬로푸드 밥상을 추천한다. 2009년 폐교가 된 청산중학교 동분교를 새로 리모델링한 '느린섬 여행학교'에는 홍보관, 슬로푸드 체험관, 숙박동(가족동, 테마동)을 갖추고 있으며 여행객들을 위해 청산도에서 자란 해조류, 전복 등 청정재료만을 이용해 만든 자연 밥상도 선보이고 있다. 7000~2만5000원까지 가격도 다양하다. 4인 이상은 3시간 전 예약이 필수다. 문의는 느린섬학교(061-554-6962)로 하면 된다.



6코스에는 구들장길이 있는데 구들장논이 있는 논길을 따라 걷는 길이다. 농토와 물이 부족했던 척박한 땅을 논으로 일군 섬사람들의 애환과 열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구들장논을 일군 청산도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청산도 사람들은 통수로 역할을 하는 수구의 구조가 구들장을 닮았다고 해서 구들장논이라 부른다고 한다. 돌과 돌사이 공극에는 멸종위기 2급 절지동물인 긴꼬리투구새우가 발견되고 있다. 올 봄에는 이 긴꼬리투구새우가 새까맣게 발견됐었다고 도현스님은 말했다. 이 구들장논은 국가중요농업유산 제1호 지정과 세계중요농업유산에 등재됐다.
상서리와 동촌리 일원의 돌담길도 볼거리다. 8코스 해맞이길은 청산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를 맞이할 수 있는 목섬, 신흥리, 상산포, 진산리를 잇는 4.1km구간이다. 실제로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는 후문이다. 9코스 단풍길에는 지역주민간 얽힌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청산도 남자들이 단풍구경을 한다는 핑계로 뭍을 자주 나가 아낙네들이 관계기관에 민원을 넣어 단풍나무를 이 구간에 식재했다는 '웃픈' 얘기도 전해진다.


이밖에도 청산중학교에서 도청항까지 이르는 골목길이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있어 붙여진 '미로길'은 길을 찾는 재미와 마을의 소소한 일상을 만날 수 있다. 한편 완도에서 청산도를 운행하는 선박은 하절기(3~10월)에는 하루 5차례, 동절기(10~3월)에는 4차례 운행된다. 소요시간은 약 45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