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수가 나쁜 건 아니다. 6·25전쟁 직후 찢어지게 가난했던 대한민국은 해산물을 수출하다가 2025년 세계무역기구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 5위 무역 초강대국으로 변신한 만큼 우리의 성과를 과시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이제는 등수의 늪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거의 모든 랭킹과 등수는 초고속성장시대에 유효했던 지표들이기 때문이다.
한중일 3국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목표를 이미 달성했고 인도네시아·베트남·인도 등의 후발주자들도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있다. 하지만 2030년대에 진입하면서 부국 수치는 서서히 국민총생산(GDP) 상승과 같은 부를 기반(wealth-based)으로 한 파워보다 민첩성 기반(agility-based) 파워로 전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가오는 거의 모든 영역 간의 <크로스오버 파워>(crossover power, XP) 시대에는 기존의 경계와 벽들이 허물어지면서 파생되는 거의 무제한의 힘과 영향력이 다각도로 발현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힘의 시대가 우리에게 반가움만 안겨주지는 않을 것이다. 본격적인 AI 중심 편의 시대, 로봇이 지배하는 노동체계, 그리고 인류를 각종 질병에서 해방시켜주면서도 동시에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세포 단위 무기 확산 등 행복과 불행이 동전의 양면처럼 뗄 수 없는 <쌍둥이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보유하고 있는 힘, 사고, 기억, 그리고 창작을 초월하는 로봇과 아바타들이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1, 2, 3 등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본격적인 XP 시대에는 의료·군사·정보·예술·문화·디자인 외의 거의 모든 분야를 새롭게 엮고 융합하고 분해하고 새로운 형태의 지식·제품·서비스·규범 등을 인류에게 제공하고 위협할 것이다. 따라서 국가권력을 능가하는 XP가 본격적으로 생산되면 국가권력과 이를 지탱해온 각종 제도, 조직, 교육, 시험, 그리고 인재관리 체계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지금은 상상을 할 수 없지만 30~40년 후 본격적인 XP 시대의 정치인은 예전의 전화교환원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XP 시대의 기초는 자율규제 시스템인 만큼 굳이 정치인·정당이 국민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필요가 서서히 없어질 것이다. 그럼 무정부·무질서·무계급의 유토피아가 될 것인가? 개인 재산·지적소유권·인권도 묵살될 것인가? 아나키스트와 극단 사회주의자들은 박수 칠 수 있겠지만 그들 역시 더 이상 폭력과 전체주의를 기반으로 한 권력을 행사하는 데에는 한계에 직면할 것이다. 왜 그럴까? XP 시대에는 거의 모든 제품·서비스·사고·지식 등이 자유자재로 탄생·교환·비축·진화됨으로써 지금처럼 부의 생산·노동 착취도 서서히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탈취할 것이 있어야 탈취가 가능하지만 부와 파워를 사실상 누구나 생산할 수 있다면 누가 빼앗아 갈 수 있단 말인가?
XP 시대의 등수와 순위는 적재적소에 가장 필요한 무엇이든 발휘하는 새로운 『기(氣)』가 순위의 감옥에서 해방시켜주는 『키』(열쇠 key)로 전환될 것이다. <氣가 키가 되는 날> 한국인들의 끈기와 빨리빨리 문화는 극과 극이 서로 녹고 융합돼서 새로운 물질·사고·의상·문화·서비스·교양 등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나라는 등수를 따라가는 나라가 아니라 <코리아 랩>(Korea Lab)을 통해서 XP를 가장 효율적으로 그리고 융성하게 생산하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제국, 중세기 중국, 산업화 시대의 영국 등 이들 제국들이 세계를 지배한 까닭은 바로 후발국들이 그들의 랩을 모방했기 때문이고 여기서 파생되는 각종 등수, 계급, 그리고 위계질서를 자연스럽게 숭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정통 파워가 당장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정부는 국가와 사회를 통제할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氣 파워> 시대에는 기업과 비정부 기관들의 영향력이 극대화될 것이며 고속·고도 기술 진화와 더불어 수많은 플랫폼을 계기로 파워는 전방위적으로 전파되고 갈라질 것이다. 더 빨리, 더 맞춤형으로, 그리고 더 신성한 해답을 제공하는 나라, 기구, 기업, 그리고 개인들이 각각 새로운 지표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더 많은 나라들이 <코리안 파워>를 모방하고 진화시키고 그리고 자기들의 필요에 맞는 방식으로 수정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옛 제국들이 만들어 놓은 등수와 랭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상상할 수밖에 없고 산적한 현안들을 해결해야 되지만 셀 수 없는 각종 XP 기반 <샌드박스>(sandbox)들이 전국 곳곳에서 가동될 때 대한민국은 더 이상 등수를 쫓아가는 나라가 아니라 21세기를 선도하는 중심 국가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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