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식 투자자는 이미 1400만 명을 넘어섰다. 국민연금과 퇴직연금, ISA, ETF까지 감안하면 주식시장은 더 이상 일부 자산가들만의 공간이 아니다. 과거 한국 정치에서 가장 강력한 민심 변수는 부동산이었다. 집값은 소비 심리와 정권 지지율을 함께 흔들었다. 그러나 반도체와 AI 랠리 이후 한국 사회는 조금 다른 국면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부동산 민심 못지않게 '주식 민심' 역시 체감경기와 정치 여론을 흔들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주식시장은 철저히 '리(利)의 세계'다. 기업 가치와 주가의 등락은 곧 내 주머니 문제다. 정치권도 '개미'들의 여론을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분위기다. 청와대 정책실장의 국민배당금 발언 직후 증시가 흔들리자 "개인 의견"이라며 급히 선을 긋고 수습에 나선 장면은 상징적이었다. 삼성전자 성과급 갈등이 장기화하면서 420만 소액주주 반발이 커지자 대통령이 직접 '주주들의 기업 이윤 몫'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실제로 삼성전자에 이어 다른 기업 노조들의 '성과급 N%' 요구가 잇따르면서 노동의 대가와 주주의 이익이 정면 충돌하는 장면도 낯설지 않다. 과거 같으면 기업 내부의 재무 판단 정도로 지나갔을 사안이 이제는 곧바로 기업가치와 소액주주 이익 훼손 논란, 온라인 여론전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치가 지지층 여론뿐 아니라 실시간 주가 반응까지 의식해야 하는 정치의 '주가 민감증'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미국 정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흐름을 보여줬다. 트럼프 대통령이 다우지수를 사실상 국정 성적표처럼 활용해 온 것도 그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 대통령이 지난해 한미 정상회담 때 다우지수 상승 얘기를 꺼내며 트럼프를 추켜세운 것은 상대의 정치 문법을 읽은 접근으로도 볼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주식 민심은 실시간으로 움직인다. 집값은 천천히 오르내리지만 주가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급등락한다. 오늘 정부를 지지했던 투자자가 내일 폭락장에서 가장 먼저 등을 돌릴 수도 있다. 심리에 크게 좌우되는 시장 특성까지 감안하면 정치는 자칫 조급해질 수 있다. 더구나 지금 장세는 특정 종목 쏠림이 심하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불안한 낙관론까지 번지고 있다. 정부로선 아슬아슬한 줄타기 형국이다.
집권 세력에는 정책 수단이 많다. 주가지수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려는 노력 자체를 문제 삼을 이유는 없다. 문제는 정치가 주식 투자자의 눈치를 보거나 휘둘릴 때다. 장기 산업 전략과 구조개혁보다 당장의 지수와 시장 반응이 더 중요한 판단 변수로 작동하는 상황이다. 집값에 민감한 정치가 부동산 포퓰리즘을 낳았듯 주가에 흔들리는 정치도 주가 하락을 막기 위한 단발성 이벤트와 설익은 정책 발표, 시장 구두 개입 같은 근시안적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증시 부양을 주요 치적으로 삼으려는 현 정부는 어쩌면 집권 기간 내내 실시간 코스피 시세에 매달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기 산업 전략보다 내일 아침 코스피부터 걱정하는 정치, 전문가 집단의 진단보다 투자자의 실시간 반응에 더 민감한 정치로는 시장의 궁극적 신뢰를 얻기 어렵다.
기업 가치도 오르고 주가도 오르면 물론 긍정적이다. 그 길로 가길 바란다. 노동의 정당한 보상도 중요하고 주주의 권익도 중요하다. 문제는 충돌 지점이 많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시장경제 원칙에 맞는 합당하고 지속 가능한 '배분의 룰이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이 "세금도 떼기 전 영업이익을 일정 비율로 제도적으로 나눠 갖는 것은 투자자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삼성 노조를 비판한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다만 정치가 시장의 환호에 과도하게 기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주식 민심은 부동산 민심보다 훨씬 빠르고 예민하며, 어쩌면 훨씬 더 잔인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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