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지난해 10월16일 워싱턴DC에서 열린 연례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는 모습. /사진=로이터
유럽중앙은행(ECB)이 중동 전쟁에 따른 에너지 가격 급등과 인플레이션 재확산 우려에 2년 9개월 만에 금리 인상에 나섰다. 주요 7개국(G7) 중앙은행 가운데 첫 긴축 전환 사례로, 글로벌 통화정책 기조가 다시 '물가 우선'으로 이동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ECB는 11일(현지시각) 통화정책회의를 열고 예금금리를 연 2.00%에서 2.25%로 0.25%포인트 인상했다. 기준금리(주요재융자금리)와 한계대출금리도 각각 2.40%, 2.65%로 올렸다. ECB가 금리를 인상한 것은 2023년 9월 이후 처음이다.

이번 결정의 배경에는 이란 전쟁 장기화에 따른 에너지 가격 상승이 자리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우려가 지속되면서 국제유가와 천연가스 가격이 오르고, 이 충격이 식품·서비스·상품 가격 전반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는 판단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기자회견에서 "중동발 에너지 충격이 예상보다 오래 지속되고 있다"며 "이번 금리 인상은 보험성 조치가 아니라 현재 상황에서 필요한 결정"이라고 강조했다.

ECB는 올해 유로존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기존 2.6%에서 3.0%로 상향 조정했다. 반면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0.9%에서 0.8%로 낮췄다. 고물가와 성장 둔화가 동시에 나타나는 스태그플레이션 우려 속에서도 경기보다 물가 안정에 정책 우선순위를 두겠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한 셈이다.

시장에선 ECB의 긴축 전환이 단순히 유럽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주요 중앙은행들의 정책 공조 흐름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2022~2023년 글로벌 긴축 국면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를 비롯한 주요 중앙은행들이 유사한 방향으로 움직였던 것처럼, 이번에도 물가 재상승 압력이 확산할 경우 각국 중앙은행들이 성장보다 인플레이션 대응에 무게를 둘 가능성이 커졌다고 분석한다.


유럽보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 역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최근 원/달러 환율 상승과 국제유가 급등으로 국내 소비자물가 상방 압력이 커지는 가운데, 한국은행 역시 물가 안정에 방점을 둔 매파적 기조를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경원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은 오는 7월에 기준금리를 인상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는 최근 "물가 안정이 중앙은행의 최우선 책무"라고 강조하며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다. 시장에선 미국 연방준비제도와 ECB 등 주요 중앙은행들의 정책 방향이 한국은행의 향후 결정에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양지성 삼성증권 연구원은 "가격 상승 압력이 에너지 부문을 넘어 경제 전반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 ECB의 금리 인상 전환 배경"이라며 "라가르드 총재의 발언은 전반적으로 매파적이었고, 9월 추가 인상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이어 "ECB가 물가 상방 위험을 성장 둔화보다 더 우려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며 "글로벌 중앙은행들의 정책 기조가 다시 인플레이션 대응 중심으로 이동할 경우 한국은행 역시 금리 인상 압력을 받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시장에선 ECB가 연내 한 차례 추가로 금리를 인상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미국 연준이 당장 금리를 동결하더라도 에너지 가격 상승세가 장기화할 경우 주요 중앙은행들이 다시 긴축 공조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는 평가다.

금융권 관계자는 "2022년과 달리 이번 물가 충격은 공급 측 요인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금리 인상의 효과가 제한적일 수 있다"면서도 "중앙은행 입장에서는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고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선제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