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는 시위가 계속된 17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에서 시민들이 재선거 등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뉴스1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난 2018년 1월 말 청와대 행사에서 평창 동계 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을 둘러싼 잡음과 관련해 "선수들의 입장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고 유감을 표시했다. 남북 단일팀 구성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오랜 시간 훈련해 온 일부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 기회가 일방적으로 박탈당했다는 논란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2030 세대를 중심으로 '한국 선수에 대한 역차별이자 절차적 정당성의 훼손'이라는 주장이 확산됐다. 2017년 '인천국제공항공사(인국공) 사태' 당시에도 청년층이 공정을 요구하며 반발했다.
이번 6·3 지방선거 직후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항의하며 거리로 나선 2030 청년들의 시위 역시 돌출 행동이 아니다. 그간 축적되어 온 청년 세대의 가치관과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추구가 다시 발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개표소 앞을 메운 청년들의 집단행동은 낙후된 한국 정치와 선거 행정의 무능에 대한 매서운 질타다. 박빙 승부처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토대이자, 유권자가 신뢰하던 시스템의 절차적 정당성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국가의 행정 부실로 인해 헌법이 보장한 최소한의 기본권마저 침해당하자 청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번 시위에서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청년들이 보여준 행동의 밑바탕에 깔린 구조적인 좌절감과 분노다. 치열한 입시 경쟁과 좁아진 취업 문턱을 겪으며 공정성이라는 가치를 삶의 생존 원칙으로 체화한 2030 세대에게, 민주주의의 출발점인 '1표의 가치'가 훼손된 상황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상식의 파괴다.


이 분노의 저변에는 몇 년째 해소되지 않고 구조화된 일자리 부족 현상과, 청년의 월급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벌어진 자산 격차 속에서 누적된 청년들의 박탈감이 똬리를 틀고 있다. 벼랑 끝에 몰린 청년들에게 최소한의 계층 이동 가능성마저 원천 차단해 버린 기성 정치가 이제는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라 할 수 있는 선거권마저 가로막았다는 극도의 무력감이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현장에서는 우려스러운 징후도 포착되고 있다. 참정권 침해 항의에 슬그머니 숟가락을 얹으려는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가세하면서, 일부 참가자들의 일탈 행동이 명분을 흐리고 있다. 경기장을 출입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적 검문이나 현장 경찰관을 향한 폭언과 조롱은 시위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자충수다. 참정권 침해라는 본질적 문제 제기가 극단적 구호와 음모론에 뒤덮이는 순간 청년들의 정당한 저항은 그 정당성을 잃게 된다. 행정 참사의 책임을 묻는 것과 검증되지 않은 부정선거론을 확산시키는 것은 엄격히 분리되어야 마땅하다.

정작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할 정치권의 행태는 여전히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애초에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도 정치의 무능과 무관심 때문이다. 2030 세대들은 기성 권력이 과정의 공정성을 무시하거나 청년들이 쏟은 노력의 가치를 외면했을 때 진영을 막론하고 단호히 저항해 왔다. 그러나 그때마다 정치는 근본적인 구조 개혁 대신 임기응변식 미봉책을 내놓기에 급급했고, 청년들의 목소리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데만 몰두했다.


이번에도 정치권은 청년들의 팍팍한 삶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대안을 모색하거나, 선거 행정 참사의 원인을 투명하게 규명하고 피해를 입은 주권자들의 권리를 구제하는 본연의 책임은 뒷전으로 미루어 두었다. 그 대신 집회 현장을 바라보며 상대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네거티브 정쟁의 소모적 수단으로만 이 사태를 소비하기 바쁘다. 다시금 '정치의 실패'만 확인하고 있다.

송파구의 외침을 한국 정치를 한 단계 진화시키는 동력으로 삼으려면, 정치권부터 감정적인 정쟁을 배제하고 구조적인 제도 개선에 즉각 착수해야 한다. 여야가 지난 16일 선관위 국정조사 실시에 합의한 만큼, 이번만큼은 정략을 철저히 배제하고 행정 참사의 진상을 명백히 밝혀야 할 것이다. 나아가 기술적 결함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투개표 시스템 전반의 재설계도 과감히 추진해야 한다. 송파구 개표소 앞의 분노를 또다시 진영 싸움으로 오독하거나 방치한다면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는 없다. 청년들의 정당한 절규를 제도 개혁으로 전환하는 책무가 이제 정치권의 무거운 과제로 남았다.

박창억 동행미디어 시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