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경기도 여주시 남한강에 4대강 사업으로 설치된 이포보가 수문을 열어 물을 흘려보내고 있다. /사진=뉴스1
한밤중에 장대비가 내렸다. 엄마가 일어나 삽을 들고 대문을 열고 앞장선다. 겁이 많았던 아부지는 엉거주춤 한 발 뒤에서 따라간다. 우산은 필요 없었다. 쏟아 붓는 장대비에 바람까지 불고 삽질하기 위해 도롱이를 걸쳤다. 플래시를 들었지만 지척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우르릉 꽝꽝 댄다. 무서움이 밀려온다. 그래도 발길을 멈출 수 없다.
개울에서 논으로 물이 들어가도록 만든 수멍을 막고 논의 물꼬를 터놓아야 한다. 무섭다고 그냥 집에 머물러 있으면 불어난 개울물이 논으로 밀려들고 물꼬를 통해 빠져나가지 못한 물은 논에 가득 차올라 결국 논둑을 터뜨릴 것이다. 논둑 하나가 터지면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계단식으로 된 논의 둑이 잇따라 터진다. 벼가 급물살에 휩쓸려 쓰러지고 흙과 모래에 파묻힌다. 이른 봄부터 애써 가꿔놓은 벼가 엎치면 한해 농사를 망친다. 길고 긴 겨울날을 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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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긴 54일 동안의 장마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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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장대비를 뚫고 수멍을 막고 물꼬를 튼 덕분으로 대개는 수해를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빗물이 개울을 넘으면 대책이 없었다. 그해는 줄어든 소출만큼 겨울의 배고픔 고통은 커졌다.
지난 6월24일부터 시작된 장마가 8월16일로 끝났다. 무려 54일 동안 이어진 사상 최장이었다. 6월1일부터 8월15일까지 전국 평균 강수량은 920㎜나 됐다. 같은 기간 평균 570㎜보다 61%나 많은 량이다. 한강과 낙동강, 영산강과 금강, 임진강 등 모든 지역에서 불어난 강물에 위협을 느꼈다. 강원도 인제군의 산간 지방에는 2325㎜나 쏟아졌다. 경기도 여주는 1398㎜, 광주는 1257㎜가 내렸다. 한국의 연평균 강수량(1370㎜)보다 많은 비가 이번 장마 때 퍼부었다.
폭우가 집중된 일부 지역에선 산사태와 강물 범람으로 37명이 목숨을 잃었다. 5명이 실종됐으며 8명이 다쳤다.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은 8100여명이나 됐다. 1548건의 산사태로 재산피해는 993억원으로 늘었다. 12개 손해보험회사에 접수된 차량 피해액은 7113건 711억원으로 잠정 집계됐다. 참으로 야속한 장마였다.
나라와 지자체에서 장마 피해에 대해 지원금을 지급할 예정이나 삶의 터전을 잃은 것에 비해선 턱없이 부족하다. 사망과 실종자에게는 1인당 1000만원, 부상자는 부상정도에 따라 1인당 250만~500만원을 지급한다. 물에 잠긴 주택은 가구당 수리비 90만원, 부서진 집은 파손 정도에 따라 100만~1300만원을 지원한다. 떠내려간 농경지는 ㎡당 3593원, 매몰된 농경지는 ㎡당 1160원 지원된다. 직접 피해를 당해본 사람은 안다. 이런 지원금이 고맙기는 하지만 다시 일어나려면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길고 긴 장마에 강수량마저 많아 피해가 잇따르자 ‘네 탓 공방’이 쏟아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4대강 사업’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4대강 사업에서 설치한 보가 폭우피해에 영향을 미쳤는지 조사해야 해야 한다고 밝혔다. 4대강 사업의 홍수예방 효과는 0%라는 공격도 가해졌다. 반면 다른 쪽에선 섬진강 유역의 물난리는 4대강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4대강 사업의 홍보예방 효과도 94%라고 맞섰다. 또 문재인 정부 들어 태양광 시설을 많이 설치하면서 나무를 잘라내 산사태 피해를 키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태양광 시설이 있는 지역에서 일어난 산사태는 극히 일부라는 반론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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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없는 ‘4대강 사업 탓’ vs '태양광 판넬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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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경찰들이 18일 인천 강화도에서 최근 집중호우로 발생한 해양 쓰레기를 수거하고 있다. /사진=해양경찰청 이런 논쟁은 결론이 나지 않는 ‘말싸움’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이번 장마피해의 가장 큰 원인은 비가 너무 많이 내렸기 때문이다. 사람이 예측하기 어려운 정도의 비가 왔는데 4대강과 태양광을 희생양으로 지목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사람이 할 일은 의암댐 안에 있던 인공 수초섬을 구하기 위해 댐의 수문을 열어놓은 상태에서 작업하다 인명피해를 입은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을 최소화하도록 하는 것이다.
옛날 순임금 시절에 홍수가 나자 곤(鯤)을 시켜 치수사업을 하도록 했다. 곤은 물길을 자연스럽게 트는 대신 물굽이마다 제방을 쌓았다. 하지만 길이 막힌 물은 둑을 무너뜨리고 피해가 커졌다. 곤을 유배보내고 그의 아들인 우(禹)에 맡겼다. 우는 물이 흐르는 대로 길을 텄다. 물길 따라 양 옆으로 제방을 쌓았다. 물은 그 길을 따라 바다로 흘러갔다. 홍수피해는 드디어 줄어들었다.
길고 긴 장마가 끝났다. 하지만 장마가 끝났다고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다. 수마가 할퀴고 간 상처가 곳곳에서 장마를 견뎌낸 사람들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 장마가 끝나자마자 34도를 넘는 폭염이 찾아왔다. 빠른 복구를 방해하는 심술꾼이다. 늦여름과 초가을에 찾아오는 불청객인 태풍에 대한 대비도 해야 한다. 장마 피해에 대한 보상을 놓고 벌어지는 책임공방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닥칠 피해에 대한 예방책을 마련하는 것도 시급하다.
책임공방은 장마 피해가 천재지변이면 국가가 배상할 책임이 없지만 대비를 잘못했다면 인재로 인정돼 배상해야 하기 때문에 벌어진다. 1998년 여름 6시간 동안 340㎜가 넘는 폭우가 쏟아져 중랑천 상류 일대가 범람했다. 노원구 주민 100여명은 서울시와 국가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하지만 법원은 ‘불가항력적 재해’라며 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2011년 ‘우면산사태’로 인명과 재산피해가 났을 때 대법원은 서초구가 경보를 제때에 발령하지 않아 주민을 대피시키지 못한 책임을 인정했다.
전북 진안군에 있는 용담댐이 도마에 올랐다. 용담댐 방류로 수해를 크게 입은 무주 금산 영동 옥천군이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수자원공사 용담지사가 용담댐 방류량을 7일 오후 5시 초당 690톤에서 8일 낮12시 초당 2900t으로 늘려 4개 시군에서 주택 204채와 농경지 745㏊(헥타르)가 물에 잠기는 피해가 발생했다는 주장이다. 용담댐은 지난달 30일 저수율이 85.3%였고 31일에는 90%까지 높아졌는데도 초당 300t만 방류했다. 특히 7일 낮12시에 댐으로 유입되는 량은 초당 2000여톤인데 방류량을 300t 아래로 유지하다 8일부터 갑자기 방류량을 크게 늘렸다. 방류량 조절 실패에 따라 피해가 늘어난 인재(人災)라는 것이다.
수자원공사는 이에 대해 방류량을 늘리지 말라는 민원이 있었다고 해명했다. 펜션이나 래프팅하는 업체들이 손해를 볼 수 있으니 방류를 멈추라는 요청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만이라면 받아들이기 힘든 해명이다.
논쟁은 명백한 증거가 제시될 때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주장과 생각만으로 논쟁을 벌이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소모전일 뿐이다. 수재민들은 예방과 증거를 원한다. 싸움은 민심을 떠나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