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근로시간 준수, 눈치 보는 나 하나가 힘없는 우리가 됩니다.'

지난 4월11일부터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진로-하이트 사무실 곳곳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있다. 엘리베이터는 물론 사옥 6층에서 14층까지 눈이 가는 곳 모두에서 이 문구를 발견할 수 있다. 지난 8일 기습적으로 진행된 진로-하이트의 합병 이후 진로 노조에서 붙인 벽보다.


최근 진로-하이트가 심상치 않다. 국내 1위 소주회사 진로와 국내 1위 맥주회사가 합쳐져 거대 주류회사로 외형은 갖췄지만 분열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외부적으로는 소주와 맥주 모두 점유율을 경쟁사에게 내주고 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 ‘맥주 1위’ 내주고, 소주는 풋백옵션에 ‘발목’ 

흡수합병의 표면적인 이유는 실적 부진이다. 2005년 하이트맥주가 진로를 인수한 후 하이트는 이렇다 할 재미를 보지 못했다. 하이트는 진로의 인수로 시너지 효과가 커질 것으로 예상했다. 하이트맥주의 연고지인 경상도에서는 진로가 수혜를 입고, 진로의 주무대인 서울 수도권은 하이트 맥주가 영업망을 넓히는 식으로 취약지역에서 점유율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
 
그러나 하이트맥주는 2005년 인수 당시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하이트맥주와 진로의 영업조직을 분리해 운영하라는 규제를 받았다. 점유율 1위업체 간 합병에 따른 독과점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결국 시너지 효과는 보지 못하고 오히려 맥주는 물론 소주마저 점유율이 떨어지고 있다. 2010년에는 최악의 실적을 보였다. 하이트의 매출액은 1조223억원으로 전년보다 단 0.5% 오른 반면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각각 24%, 29% 떨어져 1390억원과 700억원을 기록했다.


진로는 더욱 심각하다. 영업이익은 869억원, 순이익은 623억원으로 전년대비 각각 24%와 49%하락했다. 진로를 떠안은 하이트는 투자자들과 맺은 풋백옵션에 발목을 잡히고 있다. 진로에 대한 인수 시너지가 예상에 크게 못 미치자 풋백옵션을 지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상환기한을 연장하긴 했지만 이로 인한 이자 부담은 여전히 남아 있다. 남이 먹을까 집어 삼키긴 했지만 진로는 하이트에게 먹기는 귀찮고 버리기는 아까운 계륵같은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 1월에는 하이트맥주의 최대숙적인 카스(오비맥주)에 출고량이 뒤지기도 했다. 단 한달 뒤쳐진 것이긴 하만 이로 인한 해석은 분분하다. 92년 하이트맥주가 오비맥주를 꺾은 이후 처음 벌어진 상황이고 영업이 통합되고 있는 와중이었기 때문이다.


◆ 롯데 맥주시장 진입 땐 판도 대변화
 
주류시장은 1% 차이가 판도를 가를 수 있는 상황이다. 파이가 더 커질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하이트맥주는 2006년 이래 매년 점유율이 줄고 있어 만년 1위를 장담할 수 없다. 경쟁사와의 싸움에서 판관비(판매비과 관리비) 지출은 만만찮은 부담이다.

우선 하이트맥주는 오비맥주를 견제해야 한다. 주류산업협회의 보고에 따르면 '하이트'의 점유율은 2008년도 53.5%에서 4년새 43.1%로 떨어졌다. 반면 카스는 같은 기간 33.5%에서 43.1%까지 치고 올라왔다.

하이트맥주 측은 "다양한 제품 포트폴리오 확대와 영업체계를 효율적으로 재편하는 등 방어태세를 완비하겠다"며 "합병 시너지를 최대한 제고할 수 있는 공동 마케팅을 통해 효율성을 높여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제품 다양화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김민정 KTB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최근 리포트에서 "경쟁사의 제품 라인업 확장 정책에 대응하는 브랜드 투자효과가 발휘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여기에 아직 맥주사업라인이 없는 롯데주류는 호시탐탐 맥주사업체 인수를 노리고 있다. 맥주시장 판도를 크게 뒤흔들 수 있다.

김 애널리스트는 "신규 업체의 맥주시장 참여 현실화는 경쟁사 추가가 아닌 주인이 바뀌는 형국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진로도 마찬가지다. 후발주자인 롯데주류의 '처음처럼'이 약진을 계속하고 있다. 아무도 넘볼 수 없을 것만 같던 '주류강자' 참이슬에 유일한 대항마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아직 점유율 면에서는 참이슬이 압도한다. 하지만 처음처럼의 성장 속도는 진로를 긴장시킬만하다. 롯데에 인수된 지 3년 만에 14%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롯데의 유통망과 물류비용, 인적 구성 등은 처음처럼의 약진을 점치게 한다.

반면 참이슬의 점유율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 한때 60%에 육박하던 점유율은 최근 50% 아래로 떨어졌다.


◆ 진짜 이유는 아들 밀어주기?

이번 합병이 과연 주류시장의 경쟁 때문만일까? 익명을 요구한 한 내부 관계자는 '거대 주류회사' 탄생의 이면에는 2세 경영승계를 위한 포석이 깔려 있다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이번 흡수합병은 박문덕 하이트맥주 회장이 장남 태영 씨와 차남 재홍 씨에게 각각 통합된 하이트맥주와 일본 법인을 증여하겠다는 의중이 깔려있다.

태영 씨는 현재 하이트의 생맥주 기계 제조회사인 서영이앤티의 최대주주다. 이 회사는 박문덕 회장의 개인 회사로 차남인 재홍 씨는 2대 주주로 있다. 최근 3년간 하이트맥주와 서영이앤티의 거래가 폭증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아들 회사 밀어주기' 성격이 짙다. 지난해 말 국세청은 편법증여를 문제삼아 박 회장에게 38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최근 단행된 인사에서 이장규 하이트맥주 대표이사와 윤종웅 진로 대표이사, 하진홍 하이트맥주 생산담당 사장 등을 고문으로 경영 일선에서 배제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기도 한다. 하이트진로의 한 관계자는 "내부 직원들은 전 사장단에게 더 충성도가 높지 않겠냐"며 "(이번 인사는) 2세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하이트맥주 측은 "윤종웅 대표는 이미 10년간 사장을 해왔다"며 "언제까지나 사장자리에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냐"라고 반박했다. 또 "이들은 앞으로도 회사의 고문으로서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조언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또 다른 관계자는 "말만 고문이지 밀려난 것이나 다름없다"며 "정작 사무실도 없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