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돌리세요!”

지난 4월21일 새벽.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차 안에서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의 목소리는 침착하면서도 단호했다. 소속 선박인 한진텐진호가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 해적에게 공격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고 ‘한진차이나’ 명명식장에 가는 발걸음을 서울 여의도 본사로 되돌리도록 한 것이다.


명명식은 해운회사로서는 하나의 축제이자 ‘배의 이름을 짓는다’는 상징성을 가진 중요한 행사. 당초 최 회장은 경남 거제 삼성중공업에서 1만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컨테이너선인 '한진차이나' 명명식장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한진텐진호 피랍 위기 소식에 모든 일정을 망설임없이 취소했다. 그리곤 "선원 안전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며 곧바로 본사로 향했다.  


상황실에 도착한 그는 위기대처매뉴얼에 따라 상황을 처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임직원들을 일일이 다독였다. 한진해운 소속 선박과 선원 관리를 하는 자회사인 부산 한진SM에 상황실을 설치해 영상회의로 정보를 공유토록 했고, 정부와의 공조가 중요하다는 판단에서 국토해양부와 외교통상부로 본사 직원을 보내라는 지시도 내렸다.

아무리 200여척의 선박을 운영하는 국내 1위 해운선사인 한진해운이라도 처음 겪는 피랍 위기 상황에선 직원들이 이래저래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터. 그러나 최 회장은 긴장한 기색을 보인 직원들에 “아무 일도 아니다”며 농담으로 긴장을 풀어주는 의연함을 보였다.


오후 9시께 한진텐진호 선원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야 한 숨을 내쉰 최 회장은 14시간가량 비좁은 비상상황실에서 일절 떠나지 않고 김밥과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며 임직원들과 숨 막혔던 시간을 함께했다.

◆오너경영자의 리더십, 사업다각화로 흑자경영 

한진텐진호의 비상사태를 침착하고 의연하게 잘 대처했다는 얘기가 퍼지면서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의 리더십이 재조명받고 있다.

평범한 가정주부의 삶을 버리고 해운업계 대모(大母)로 떠오르기까지 평탄치 않은 길을 걸어왔던 그이기에 이번 일이 오너경영자의 리더십을 제대로 보여준 사례라는 평가도 낳았다.
 
최 회장은 NK그룹(옛 남경그룹) 최현열 회장과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넷째 여동생인 신정숙씨 사이에서 첫째딸로 태어났다.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 회장뿐 아니라 농심 신춘호 회장, 일본산사스식품 신선호 회장, 푸르밀 신준호 회장이 모두 그의 외삼촌들이다.

일본 성심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한달 만에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삼남인 고(故)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과 결혼한 그는 가정주부로 지내다 지난 2006년 남편의 갑작스런 별세로 경영일선에 나섰다.

전업주부였던 그가 국제해운업계의 대표적인 컨테이너선사의 경영을 맡는 것에 대해 주변에선 우려의 시각이 많았던 게 당연지사. 하지만 최 회장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앞세운 자신 만의 경영방식을 추구하며 위기에 빠진 한진해운을 과감히 구해냈다.

2006년 7월 한진해운 자회사인 싸이버로지텍 부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2007년 2월 한진해운 부회장, 2009년 1월 한진해운 대표이사 회장, 그해 12월 한진해운홀딩스 대표이사 겸 회장에 오르기까지 그는 전문경영인 못지않은 성과들을 속속 만들어냈다.

2009년 이후 해운업계가 사상 유례없는 불황에 빠졌을 때 전문경영인인 김영민 사장과 함께 위기 상황을 성공적으로 극복하면서 경영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2009년 11월 채권단과 재무구조개선약정을 체결할 정도로 경영난에 처했던 한진해운을 강도높은 비용 절감과 수익성 향상을 위한 사업다각화로 회사를 흑자로 돌려놓았다.


◆한진해운그룹 출범하나

최 회장이 남편의 뜻을 이어받아 한진해운을 안정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사이, 재계는 한진그룹에서 독립해 한진해운그룹이 탄생할 수 있느냐에 또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다.

평소 최 회장 본인도 “전 세계 물류업체 중 항공과 해운을 동시에 하는 곳은 없다”며 계열 분리 의지를 심심찮게 밝혀왔었기에 더 그렇다.

지난해 초 한진해운을 지주회사인 한진해운홀딩스와 사업자회사인 한진해운으로 분할한 것 역시 계열분리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한진해운홀딩스를 중심으로 한진해운, 싸이버로지텍 등의 자회사를 두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한진해운 대표이사와 더불어 한진해운홀딩스 대표이사 회장을 겸임 중이다. 특히 한진해운홀딩스 출범에 이어 지난해 3월 공개매수를 통해 이 회사 지분을 32.7%까지 확보, 독립경영을 위한 안정적인 지배구조를 마련하는데도 성공했다. 우호지분까지 포함하면 최 회장의 지분은 47.6%에 달해 시숙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보유지분 27.4%)과의 격차를 20%포인트까지 벌린 셈이다.

이와 더불어 지난 1월 최 회장의 두 딸인 조유경, 조유홍 씨가 각각 대한항공 지분 3000주씩을 장내 매도한 것을 놓고도 업계는 중장기적인 계열분리를 위한 조치로 해석한다. 앞서 지난해 8월에도 최 회장 일가는 대한항공 지분을 일부 매도한 바 있다. 당시 최 회장은 1990주, 조유경 조유홍씨가 각각 5000주, 4000주의 지분을 팔았었다.

한진그룹은 지난 2002년 창업자인 고 조중훈 회장이 타계한 후 형제간 계열 분리가 이뤄졌다. 장남인 조양호 회장이 대한항공을 주축으로 한 한진그룹을 맡고 차남인 조남호 회장이 한진중공업그룹을 맡고 있다. 4남인 조정호 회장은 메리츠금융그룹을 기반으로 금융계열사를 떼어 독립했다.

따라서 3남인 고 조수호 회장이 한진해운 계열을 도맡아 왔으나 지난 2006년 작고하면서 부인인 최은영 회장이 경영일선에 나섰고, 지배구조상 한진그룹 계열에 포함된 한진해운이 독자적인 기반을 마련한 만큼 이제 서서히 독립할 시기가 됐다는 해석들이 지배적이다.

한편 최 회장은 두 자녀와 함께 보유 중인 대한항공 주식 일부를 매각한 것과 관련 "계열 분리와는 관계없다. 상속받은 것을 주가가 올라 투자개념으로 판 것이고 지분경쟁과는 관계가 없다"며 명확한 선을 긋고 있다.


최은영 회장의 사내 호칭은 ‘동대문(DDM)’

최 회장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흔히 ‘따뜻한 카리스마’로 수식된다. 직원들을 대할 때는 한없이 따뜻하지만, 업무지시를 내리거나 위기를 헤쳐 나갈 때는 남성 못지않은 추진력과 적극성을 보인다는 전언이다.

실제 최 회장은 직원을 끔찍하게 챙기기로 유명하다. 수시로 직원들과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함께하며 애로사항과 관심분야에 대한 얘기를 경청하는 것은 물론, 사내 와인동호회에도 참석해 직원들과 와인 잔을 같이 기울인다. 밸런타인데이에는 직원들에게 초콜릿을 선물하기도 하고 직원들의 애로사항을 e메일을 통해 받은 후 이에 대해 일일이 답장을 해주는 ‘스킨십 경영’도 마다않는다.

특히 최 회장은 직원들에게 자신을 대한민국 보물 1호인 ‘동대문(DDM)’이라는 애칭으로 불러줄 것을 강요(?)하며 직원들에게 다가가기를 즐긴다. DDM은 오너경영자를 지칭하는 코드명인 ‘DD’에 마담을 의미하는 M을 붙인 약어. ‘회장님’이라는 딱딱한 호칭 대신 ‘동대문’이라는 별명으로 바꿔 직원들과 편하게 소통하고자 한데 따른 일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