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품 경쟁 전방위 확산
최근 A보험사는 사내 IT기기 등 사무용품을 대거 교체했다. A보험사가 퇴직연금을 유치한 대형 IT업체가 자사 시스템으로의 교체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대기업이 퇴직연금 가입을 미끼로 금융사에 자사 상품 구매를 강요하는 '역꺾기'가 벌어지고 있는 것.
심지어 퇴직연금을 두고 금융권이 사활을 건 경쟁을 벌이면서 금융사가 타 금융사에 '역꺾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얼마 전 B은행의 퇴직연금을 유치한 한 보험사의 직원들 상당수는 월급통장을 B은행 계좌로 바꿨다.
"금융 계열사를 둔 기업들의 퇴직연금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해당 금융사의 실적을 올려주는 '상부상조'(?) 행태가 통용되고 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는 전언이다.
0.1%라도 높은 금리 보장으로 퇴직연금 가입자를 유치하기 위한 '금리 덤핑'은 근래 경품 경쟁으로 변질되는 양상이다. 지난해 5월 금융감독원은 퇴직연금사업자들에게 원리금보장형 퇴직연금 상품 제안 시 리스크관리위원회의 사전심사를 받도록 해 고금리 경쟁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고금리는 주춤하는 사이 경쟁은 경품 제공으로 옮겨 붙었다.
퇴직연금에 가입해주면 상품권이나 건강 검진권을 준다거나 펜션이나 콘도 이용권을 약속하는 사례 등이 속출한 것. 또한 스마트폰 제공에서 상조 서비스까지 다양한 품목이 등장하면서 시장 왜곡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50여곳의 은행, 증권, 보험사가 뒤섞여 퇴직연금 가입자 유치를 위해 경쟁을 벌이다 보니 어떤 식으로는 튀지 않으면 생존경쟁 자체가 어렵다는 게 업계의 하소연이다. 금감원의 1년간의 고금리 규제 시한이 지난달 8일 종료되면서 금리 경쟁도 다시 되살아나는 조짐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향후 수익 가능성이나 기여도에 따라 금리 우대 등을 다르게 적용하는 것은 퇴직연금뿐 아니라 모든 금융거래에서 기본"이라며 "이를 고려하지 않고 동일하게 금리 규제를 하면 또 다른 왜곡경쟁을 부추길 수 있다"고 반발했다.
◆과도한 밀어주기
과도한 계열사 밀어주기가 금융회사 간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기업 계열사가 아닌 증권사들은 경쟁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돼 공정 경쟁이 어려워진다.
현재 관심이 집중되는 곳은 기아차. 지난해 말 현대차에 이어 모든 금융사들이 군침을 흘리는 기아차가 이번에 퇴직연금 운용기관 선정에 나서면서 또다시 특혜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기아차의 퇴직연금 적립규모가 1조원이 넘는 대어 인만큼 각 금융사들이 유치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지만, 지난해 현대차 사례를 들어 크게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다.
지난해 말 현대차는 퇴직연금 자산관리기관으로 은행과 보험사 13곳을 선정했지만 운용 관리기관으로는 계열사인 HMC투자증권 1곳만 골라 퇴직연금 적립금 1조원을 모두 맡겼다. 덕분에 업계 최하위였던 HMC투자증권의 퇴직연금 운용 순위는 단숨에 1위로 올라섰다.
문제는 금융회사의 운용 능력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제식구 챙기기' 차원에서 밀어주면 근로자들이 보다 능력 있는 운용사 선택에 제한을 받아 피해를 입게 된다는 점이다. 계열사 물량 지원으로 퇴직연금 영업 실적을 올린 금융사가 낮은 수익률을 보일 경우 논란이 따를 수밖에 없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확정급여(DB)형 퇴직연금을 취급하는 14개 증권사 적립액은 3월 말 기준 3조7698억원을 기록했다. 이 중 DB형 적립액 1위는 HMC투자증권으로 1조4666억원을 모았지만, 이 증권사 DB형 수익률은 1.19%로 9위를 차지했다.
이러한 HMC투자증권이 다시 기아차를 독식할 가능성이 점쳐지자 업계의 불만이 제기되고 있는 것. 이에 대해 HMC투자증권 관계자는 "HMC투자증권의 공시 수익률이 타사대비 낮은 이유는 적립금 대부분이 지난해 금감원 고금리억제정책 이후에 유치된데 주요 원인이 있다"며 "타사는 지난해 금감원 고금리 억제정책 이전에 7~8%대 고금리를 제시해 유치함으로써 이번 2011년 1분기 수익률에 영향을 미친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기아차 퇴직연금 유치와 관련해서 이 관계자는 "기아차 노조원 동의도 필요하고, 아직 결정된 것이 없는 것으로 안다"며 섣부른 시장의 추측을 경계했다.
◆대형사 과점 부추키는 공공기관
대형사 과점현상도 심화되는 양상이다. 4월 말 기준으로 삼성생명이 점유율 1위(15.0%)를 기록하고 있고, 국민은행(9.4%), 신한은행(8.9%), 우리은행(8.5%), 기업은행(6.0%), 교보생명(4.6%)이 뒤를 잇고 있다. 퇴직연금 사업자 50여곳 중 상위 5곳이 전체의 절반 정도(47.8%)를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공공기관이 이러한 대형사 과점을 부추기는 양상이라 논란이 일고 있다. 공공기관이 사업자를 선정하는데 퇴직연금 적립규모를 반영하면서 중소형 금융사의 입지가 더욱 좁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소형 금융사 관계자는 "규모로 승부하게 되면 중소형 금융사는 운용능력이 좋아도 경쟁에서 밀리게 되고 이는 다시 가입자의 다양한 선택권을 제한한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올해 50조원 규모가 예상되는 퇴직연금시장을 둘러싼 이러한 과열 경쟁은 사업자들끼리의 선점 경쟁뿐 아니라 이를 이용한 소비자들의 압력 행사가 더해져 누가 피해자인지 모를 혼탁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더구나 이와 같은 불공정 경쟁의 피해가 퇴직연금 가입자들에게 돌아올 수 있는 만큼 소비자들의 자정 노력도 요구되고 있다. 퇴직연금 사업자들은 업종에 따라 첨예한 입장 차이가 있고 실적 경쟁에 내몰리고 있어 사실상 자체 정화 노력을 기대하기 어렵고, 금융당국의 규제도 사실상 한계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방하남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당국의 공정한 관리감독이 우선이지만 현실적으로 뒷거래가 이뤄진 경우 파악이 쉽지 않은 측면이 있다"며 "단기적으로 달콤한 미끼가 시장의 경쟁을 훼손하면 장기적으로는 결국 소비자의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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