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난은 말할 것도 없구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엘리베이터가 흔들려서 탈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요. 재건축 허용연한까지는 20년 넘게 기다려야 하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리모델링밖에는 해답이 없어요."(경기 분당 B아파트 입주민)
지난 1991년 입주를 시작한 1기 신도시 아파트가 준공된 지 20년을 맞으면서 리모델링 추진 단지가 늘고 있지만 대부분 사업이 지지부진하다. 리모델링은 재건축과 달리 가구수를 늘릴 수 없어 분담금 증가, 동의율 저조 등 문제로 사업추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분당·평촌 등 1기 신도시를 비롯한 수도권 주민들은 "수직증축 리모델링을 통해 건립가구수를 늘려 일반분양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가구수를 늘리지 않고는 조합원 분담금 부담이 커 사업을 추진할 수 없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여·야 정치권은 지난 4월 분당 보궐선거에서 리모델링 문제가 선거 쟁점으로 떠오르자 앞다퉈 리모델링 관련 제도를 개정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정부도 전문가로 구성된 태스크포스(TF)를 꾸려 리모델링 관련 제도를 종합점검하겠다고 밝혔다.
◆정부, 아파트 수직증축 리모델링 결국 '불허'
하지만 정부가 수개월간 점검 끝에 내린 결론은 "수직증축 리모델링 불허"다. 국토해양부는 7월28일 리모델링 제도개선을 위한 TF 최종회의 결과 가구수를 늘리는 목적의 수직증축 리모델링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는 수직증축 리모델링 논란이 시작된 3∼4년 전과 같은 결과다.
가구수 증가를 동반한 전면 리모델링은 자원 낭비가 커 리모델링 도입 취지에 맞지 않고 용적률 과다 상승에 따라 도시 과밀화 등 주거환경이 악화될 수 있다는 게 국토부의 근거다. 도로, 상하수도, 공원 등 기반시설 부족, 재건축과의 형평성 문제, 구조 안전성 등도 수직증축 리모델링 불허 이유로 꼽혔다.
국토부는 대신 주택 노후화에 따른 주민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현행 법령 내에서 리모델링 지원 방안을 내놨다. ▲중소형주택 리모델링 사업에 국민주택기금 장기저리 융자 ▲리모델링 사업 매뉴얼 제정 ▲리모델링 세부대상 및 유형에 대한 단가 등 정보제공 ▲장기수선충당금 최소 적립기준 마련 등이 주요 내용이다.
하지만 수도권 리모델링 추진 단지 주민들의 불만은 고조되고 있다. 국토부가 제시한 수직증축 리모델링 불허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학수 범수도권 공동주택 리모델링연합회장은 "국토부가 구성한 리모델링 TF는 영등포구 당산동 평화아파트, 강남구 도곡동 동신아파트 등 실제 사업 모델에 대한 분석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며 "자원 낭비, 구조 안전성 등 수직증축 불허 근거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를 공개하라"고 지적했다.
또 1기 신도시를 비롯해 서울·경기 등 범수도권 리모델링 단체는 공동으로 기자회견, 규탄대회를 열 계획이다. 이형욱 1기 신도시 리모델링연합회장은 "정부 주장대로 안전에 문제가 있다면 직접 들어가서 거주할 주민들이 수직증축 리모델링을 어떻게 요구할 수 있겠냐"며 "노후주택에서 불편하게 생활하는 주민들이 늘고 있는데도 무조건 (수직증축 리모델링을)반대만하는 정부를 규탄하는 자리를 만들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리모델링사업을 포기하는 단지가 늘어 사업에 타격이 클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A대형건설사 관계자는 "법안 개정이 막혀 수년 전에 수주해놓고 진행하지 못하는 사업장이 많다"며 주민들이 부족한 주차공간, 노후된 시설을 참고 견디는데도 한계가 있는 만큼 리모델링을 포기하는 단지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분당·평촌신도시 아파트 리모델링 사실상 중단
정부의 불허 결정으로 분당, 평촌 등 수직증축 허용에 큰 기대를 걸었던 1기 신도시의 아파트 리모델링 추진이 사실상 어렵게 됐다. 부동산정보업체 부동산114에 따르면 6월 말 현재 수도권에서 리모델링 사업을 추진 중인 아파트는 32개 단지, 1만8577가구다. 서울은 강남구와 강동구, 광진구 등에, 경기도는 1기 신도시에 리모델링 단지가 많다. 분당과 평촌은 대다수 단지가 시공사를 선정하고 조합설립인가를 받는 등 리모델링사업에 적극적이다.
또 준공된 지 15년이 지나 리모델링이 가능한 수도권 아파트는 156만5800여가구에 이른다. 이는 전체 아파트 406만6800여가구의 40%에 달한다. 특히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경우 전체 공동주택 255개단지 14만1798가구 가운데 약 60%인 8만6954가구가 리모델링 허용 요건인 준공 후 15년에 도달했다. 판교신도시를 제외하면 분당구 공동주택의 93%가 해당한다.
이들 수도권 단지 주민들이 수직증축 리모델링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주택이 낡아 생활이 불편한데 재건축 허용연한을 채우려면 20년 이상 기다려야 해서다. 신도시의 경우 용적률이 250% 정도로 높아 재건축을 추진해 법정상한선인 300% 용적률을 적용받아도 실익이 별로 없는 것도 리모델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다.
정부의 이번 결정으로 1기 신도시 등 수도권 리모델링사업에는 '빨간불'이 켜졌지만 당장 매물 출시, 가격 하락 등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봤다.
김규정 부동산114 본부장은 "정부의 입장이 확고했던 데다 재건축으로 전환하려면 갈 길이 멀어 당장 실망매물이 쏟아지지는 않을 것"이라며 "리모델링 단지는 재건축과 달리 실제 거주하는 집주인들이 많아 시장 충격이 덜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은 '국회로'…최종 결론 어떻게
국토부가 '수직증축 리모델링 불허' 입장을 확고히 하면서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모두 수직증축 리모델링을 허용하는 내용의 법안을 의원 입법 발의해 놓은 상태여서다.
리모델링 단지 주민들은 정치권에 기대를 걸고 있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있는 만큼 정치권이 긍정적인 결론을 내릴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평촌의 한 리모델링 추진 아파트 주민은 "사실 입법부인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면 행정부야 따라 올 수밖에 없지 않냐"며 "한나라당과 민주당 모두 리모델링 법안에 긍정적인 만큼 국회 결정을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리모델링을 선거전략으로 이용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서울 강남구 리모델링 추진 단지의 한 주민은 "하루하루 낡은 집에서 생활하는 것도 힘든데 정치권이 리모델링 쟁점을 내년 총선까지 끌고 갈까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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