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산맥을 평지로 만드는 '천지개벽' 수준의 대공사임에도 용인이 최종 입지로 선택된 배경에는 수도권의 풍부한 인력풀과 기존 반도체 생태계와의 연계성이 핵심으로 작용했다. 그래픽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일반산업단지 전경/사진=SK하이닉스 제공
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덤프트럭이 지나간다. 산을 깎아낸 뒤 허허벌판이 남았다. 사방에서 중장비의 굉음이 들려온다.
경기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일대.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 일반산업단지 건설 현장이다. 415만㎡(약 126만평) 규모의 초대형 부지 조성 공사다. 계획서상 깎아내는 흙(절토)만 3787만㎥, 다시 쌓는 흙(성토)은 3100만㎥에 달했다. 이를 25톤(t) 덤프트럭 운행 횟수로 환산하면 252만대에 이른다. 현재 공정률은 약 80%다.

반면 삼성전자가 인근 이동읍·남사읍 일대에 건설할 예정인 777만㎡(약 235만평) 규모의 첨단시스템반도체 국가산업단지는 2023년 계획 발표 이후 약 3년이 지났지만 아직 공사를 시작도 못했다.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가 필요로 하는 막대한 규모의 전력과 용수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님비(NIMBY)에 막힌 송전망
전기를 생산하는 대규모 발전 및 유틸리티 시설은 대부분 비수도권에 집중돼 있어, 수도권 일대 기존 전력 인프라는 이른바 '메가 클러스터'가 요구하는 막대한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픽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대한 전력 공급계획. /그래픽=강지호 기자
반도체 생산라인은 단 1분만 전기가 끊겨도 수십억원의 손실이 발생하는 만큼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적이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필요로 하는 전력은 유효전력 기준 약 16GW(기가와트)로 추산된다. 이는 2024년 기준 대한민국 전체 최대 전력 수요의 약 16.5%에 해당하는 규모다.
16GW에 달하는 전력 수요 가운데 클러스터 내 자체 발전으로 충당할 수 있는 용량은 약 4.5GW 수준에 그친다. 나머지 약 11.5GW는 외부에서 공급받아야 한다. 그러나 지난해 12월까지 용인 클러스터에 필요한 전력 중 공급 방안이 확정된 건 약 9GW 뿐이다. 2.5GW의 전력을 아직 구하지 못한 셈이다.


한국전력거래소가 조사한 2025년 전력자급률을 보면 경북(252%), 전남(215%), 충남(209%) 등 남부지방은 전력이 남아돈다. 반면 경기도는 59%로 타 지역의 전력을 끌어와야만 하는 상황이다. 문제는 남아도는 남부의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외부 전력 확보를 위해서는 동해안 지역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는 초고압직류송전(HVDC)망과 호남 지역에서 연결되는 대규모 송전선로 구축이 필수적인 과제로 꼽힌다. 그러나 동해안에서 경기 하남까지 약 280km를 연결하는 동해안–수도권 HVDC 사업은 종점 역할을 하는 동서울변전소 증설과 관련해 하남시 인허가 절차가 지연되면서 사업이 차질을 빚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성시도 HVDC의 지역 통과 가능성이 제기되자 반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충북 등에서도 환경 파괴 등을 이유로 주민 반발이 이어지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전력공사는 "현재 주민수용성 제고 방안을 정부와 협의중"이라며 "하남시가 인허가를 지연시키고 있어서 전력망 특별법을 통해 인허가 확보를 준비중에 있고 하반기 인허가 확보와 착공을 목표로 추진중"이라고 했다.


막대한 전력을 서울 면적의 약 1.9%에 불과한 좁은 부지에 집중 공급하는 구조 자체가 위험 요인이 돼 사업 추진 과정에서의 추가적인 지연도 우려스럽다. 유재국 국회입법조사처 선임연구관은 "용인 클러스터의 면적당 피상전력은 서울의 32배에 달한다"며 "변전소 분산 설치, 송전망 이중화, 일부 구간 지중화 등 다양한 방안이 검토돼야 한다"고 했다. 초고밀도 환경에서는 전력 수요가 특정 지역에 과도하게 집중되면서 계통 불안정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전 관계자는 "현 공급 방안을 수립시 이중고장(N-2)을 포함해 전력계통신뢰도 및 전기품질 유지기준에서 요구하는 모든 신뢰도 기준을 만족하도록 선로와 변전소 계획을 세웠다"며 "계통 안정성과 전력 공급 우려를 무겁게 인식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국가 기간 전력망을 적기에 구축해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전의 재정 부담에 따른 공사 지연 등도 우려된다. 한전은 최근 흑자를 내기 시작했으나 최대 과제인 누적적자를 해소하기까진 갈 길이 먼 상황이다. 2025년 말 별도기준 한전의 누적 영업적자는 약 36조1000억원에 달하며 부채 규모는 118조원 수준이다. 차입금 잔액 역시 84조9000억원에 달한다.

문제는 한전이 2038년까지 용인 클러스터를 포함한 국가 기간 전력망 확충에 73조원을 투입해야 한다는 점이다. 재무 건전성이 악화된 상태에서 이 같은 대규모 투자 재원을 적기에 마련하지 못할 경우 전력망 구축이 지연될 수도 있다.
용수 부족에 '새만금 이전론'까지
그래픽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용수 공급 로드맵단지. /그래픽=강지호 기자
공업용수 확보도 용인 클러스터 사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는 웨이퍼 표면의 미세한 오염 물질을 제거하는 세정 공정에 고도로 정제된 '초순수'가 지속적으로 공급돼야 한다. 이 때문에 수자원 확보 여부는 생산 수율과 직결된다.
SK하이닉스 용인 클러스터에서 팹 4기를 운영하려면 하루 약 57만3000t의 공업용수가 필요한 것으로 추산된다. 삼성전자가 팹 6기를 가동할 경우에는 약 76만4000t이 필요하다. 이는 용인 내에서 자체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규모다. 경기연구원이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반도체 국가첨단산업단지 2단계 사업이 완료되고,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가 증설되는 2030년대 중반에는 하루 약 90만㎥의 용수가 부족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정부는 공업용수 공급 계획을 마련했다. 1단계로 2031년까지 하루 31만t을 공급하고, 2단계로 2035년까지 하루 76만t을 공급할 계획이다. 전체 계획상 공급 규모는 하루 약 107만2000t에 달한다. 그러나 최근 특정 지역 기반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용인 클러스터의 '전북 새만금 이전론'이 제기되면서 관련 계획의 이행이 지연되고 있다.

용인시 관계자는 "정부와 관계 부처가 전력망 구축 및 공업용수 공급 계획을 수립한 것은 맞지만 실제 실행 시점과 구체적 방식은 아직 명확히 발표되지 않았다"며 "국가산단과 연계된 계획은 국토교통부의 승인 절차를 거쳐 수립된 것으로 최근 이전론 관련 논란 등으로 지역 차원에서는 향후 변동 가능성을 주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반도체 삼국지'의 저자 권석준 성균관대학교 반도체융합공학과 교수는 '동행미디어 시대'와의 통화에서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는 인프라 문제를 원스톱으로 해결해 주는 국가 차원의 컨트롤타워가 있지만 한국은 기관과 지방정부, 중앙정부 사이에 규제 장벽이 남아 있다"며 "인프라를 갖추는 데도 시간이 걸리지만, 규제를 하나하나 해결하는 데도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