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겸 SK그룹 회장이 지난달 28일 KBS '다큐 인사이트 인재전쟁 2 : 최태원의 대답'에서 특별 강연을 하고 있다./사진=뉴스1

중국 북서부 고비의 모래사막은 버려진 땅이었다. 지금은 1만2000개의 태양열 반사판이 일제히 중앙탑으로 열을 보내 엄청난 전력을 생산한다. 황무지 서부의 전력은 동쪽의 산업 지역에 보낸다. 이른바 '서전동송'(西電東送) 정책이다. 인공지능(AI)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전력 싸움에서 중국은 이미 미국을 앞서간다. '저공(低空) 경제'는 또 어떤가. 중국은 지상에서 1km 이내 공간을 저공 영역으로 정해 전략 사업으로 밀고 있다. AI로 드론을 날리는 것을 넘어 물류와 농업·소방 같은 산업과의 융합을 꿈꾼다. 하늘을 규제 없이 활용할 수 있는 '실증 공간'으로 허용하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두 장면은 최근 화제였던 KBS 다큐멘터리 '인재 전쟁 2'에 소개된 내용이다. 곱씹어보면 공통으로 담긴 코드가 있다. 바로 '마음껏 실험하고, 시도하라'는 교훈이다. 이것이 전제돼야 비로소 AI 패권 전쟁에서 '속도'를 담보할 수 있다. 속도는 왜 중요한가. 선점과 선두는 곧 승률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중국 엔지니어들은 먼저 행하고 먼저 시험하는 '선행선시'(先行先試) 문화를 자랑한다. 거침없는 진격의 관행은 절로 생기지 않았다. '규제 같은 건 생각 말라'는 중국 정부가 뒤에 있었다.

주눅 드는 중국 사례를 놓고서 "남보다 느려지면 잡아 먹힌다"는 경고가 곧장 나왔다. 발언자는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자 SK그룹 회장이었다. 최 회장은 방송에 연사로 등판해 AI 시대의 절박하고도 시급한 화두를 여럿 던졌다. 강연 도중에 개인적으로 '이거다' 싶은 순간이 있었다. 바로 'AI 시티'를 제안한 대목이었다. AI 기술과 제도를 실험할 수 있는 특정한 도시 공간을 말한다. 최 회장은 "완벽한 제도를 기다리다 글로벌 속도전에서 도태된다"면서 조속히 AI 시티를 구축하자고 제언했다. 먼저 공청회를 하고, 법과 제도를 만든 뒤, 감독 기관을 두는 방식. 이런 20세기의 틀로는 이제 먹히지 않는다는 호소다.


AI 시티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국토교통부 자료를 찾아보니 지난해 9월 태스크포스 팀을 꾸렸고, 여러 회의 끝에 6월에 강원권과 충청권에서 AI 시범 도시를 정한다. 교통∙에너지∙로봇에 AI를 접목하고, 민간 기업도 들어와 시험할 수 있도록 규제도 손질한다. 현재 국정과제 '31번'으로 사업을 추진한다. 광주광역시에선 도시 전체를 자율주행차 200대가 시험 주행하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시간은 빠듯하다. 자율주행 실증 사업만 해도 "미국과 중국의 실력이 성인이면 우리는 초등학생 수준'이라는 게 국토부의 절박한 평가다. 비단 이동 수단뿐 아니다. AI 시티에선 에너지, 의료, 재난방지, 교육처럼 도전 분야가 무궁무진하다. 여기서 성공하면 새로운 이윤 산업으로 키울 수 있다. 마침 청와대에 'AI 미래기획수석' 자리가 있다. 공석인 수석 자리에 누가 들어가든 국정 과제 순번도 당기고, 더욱 다양한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조율해 더 빠르고 과감하게 지원하면 좋겠다. 새만금에선 현대차가 큰돈을 투입해 로봇택시 실증 사업을 추진한다는데 민간이 참여할 유인도 더 많아져야 한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AI 시티의 '본질'이다. 많은 정부 프로젝트가 그랬듯 '보여주기'로 흘러선 안 된다. AI 서비스가 멋지게 구현된 물리적 도시를 완성하는 일도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최 회장은 결과물로서 도시 자체보다는 사전적인 '규제 프리(Free)'에 더욱 방점을 찍고 있다. 그는 이른바 '샌드박스' 제도를 도입하자고 강조했다. 아이들이 모래밭에서 마음껏 뛰어놀 듯, AI 기술과 서비스를 제약 없이 펼칠 경연장이 절실하다는 취지다. 다소 파격적으로 "스타트업 종사자, 전문가들을 보내 아예 자치를 해보라고 하면 좋겠다"고 제안한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보인다.


누군가는 AI 시티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며 부작용이나 안전사고를 우려할 수 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미리 경험해 봐야 문제를 빨리 수정하고 대안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중국보다 늦었다지만 부정적으로 생각할 일은 아니다. 한국은 디지털 수용도가 높아 AI 시티를 다루기에 좋은 환경이다.

지금은 제도를 만든 뒤 실험하는 게 아니라, 먼저 실험한 뒤 제도를 만드는 시대가 됐다. 중국은 이미 거대한 실험실을 만들었다. 우리는 아직 '실험 계획서'를 쓰고 있다. 마음껏 실력을 시험하고, 실패해도 되는 '모래밭'이 절실하다. 지금 뜨거운 화두 중 하나가 'AI 반도체 이윤'을 둘러싼 분배 논쟁이다. 잊지 말아야 할 질문이 있다. 10년 뒤에도 또 다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나올 수 있는가. 모두가 더 오래, 더 많이 나누기를 바란다면 답은 분명하다. 혁신의 모래밭부터 넓혀야 한다.

김준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