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통상 주무 부처인 상무부의 하워드 러트닉 장관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미국으로 불러와 생산시설을 짓게 하고 싶다"며 한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의 대미 투자 확대를 공개적으로 압박했다. 9일(현지시간)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의 뉴욕주 생산공장 기공식에서다. 그는 "마이크론이 앞장서고 있으니 경쟁사들도 결국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은 여러분이 사업을 영위해야 할 곳은 바로 미국임을 분명히 밝혔으며 세계가 이에 빠르게 반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임기 내 세계 반도체 생산의 40~50%를 미국에서 담당하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관세 카드 등 강력한 보호무역 조치를 동원해 해외 기업의 미국 투자를 압박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마이크론이 미국 내 투자 규모를 2500억 달러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한 직후 러트닉 장관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직접 거론하며 투자 확대를 요구한 것은 예사롭지 않다. 지난 3월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TSMC가 애리조나주에 1000억 달러 규모의 생산시설 투자를 결정한 데 이어, 이제는 한국 기업들까지 미국 생산 확대 압박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이미 텍사스주에 파운드리(위탁생산) 공장을,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에 후공정(패키징) 공장을 각각 짓고 있다. 러트닉 장관의 발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인공지능(AI)에 필요한 메모리 반도체의 핵심 제조시설(전공정 팹)까지 자국에 세우라고 종용한 것으로 읽힌다. 미국 원천기술이 들어가고 미국 시장에서 필요한 메모리 반도체는 미국 내에서 만들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문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미 국내에서도 막대한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청주 팹 등에 대규모 국내 투자를 진행 중인 것은 물론 최근엔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에도 800억 달러 규모의 투자가 예정돼 있는 상황에서 미국 내 투자까지 고려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들 수 있다.
미국의 투자 확대 요구가 더욱 거세질 경우 한미 통상 마찰로 확대될 가능성도 우려된다. 더욱이 미국은 높은 인건비와 건설비, 소재·부품·장비 공급망 부족 등으로 수익성 확보에 한계가 있다. 전임 바이든 행정부 시절 반도체법을 통해 약속했던 보조금마저 트럼프 행정부가 전면 재검토하는 등 정책의 연속성도 흔들리는 상황이다.
정부와 기업 모두 치밀한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기업은 글로벌 공급망과 투자 포트폴리오를 재점검하고, 정부는 통상 압박 완화를 위한 다양한 레버리지와 논리를 준비해야 한다. 무엇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생산 여건을 갖춘 한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해 미국 시장에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형태가 미국의 경제안보에도 유리하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양국간 대화 채널이 더욱 원활하게 작동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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