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정/엣나인필름 © 뉴스1

(서울=뉴스1) 고승아 기자 = 배우 예수정(65)이 '69세' 노년 여성의 삶을 그려냈다. 지난 20일 개봉한 영화 '69세'는 성폭행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루지만, 외려 그 속에서 집단화된 노년의 모습이 아닌 일반적인 삶의 태도를 지닌 노년 여성의 삶을 담담한 태도로 표현했다. 영화 속 '효정' 그 자체가 된 예수정은 작품을 마무리하고, 배우와 노년의 삶에 대해 전했다.
영화 '69세'(감독 임선애)는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69세 효정이 부당함을 참지 않고 햇빛으로 걸어 나가는 결심의 과정을 그려냈다. 단편영화 연출과 '사바하' '남한산성' '화차' 등의 스토리보드 작가로 활동한 임선애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1979년 연극 '고독이란 이름의 여인'으로 배우 생활을 시작한 예수정은 연극과 매체를 오가며 여전한 연기 열정을 보여주고 있다. '부산행' '신과 함께' 등 여러 영화에서 모성애를 드러내다가도,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2019)에서는 모진 대기업 총수로 분했다. 영화 '허스토리'로는 탄탄한 팬덤을 구축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예수정은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69세 효정 역을 맡았다. 최근 뉴스1과 만난 예수정은 이번 영화를 선택한 이유를 먼저 말했다.

"69세 사람이 청년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다는 것, 그리고 이 취약성을 지닌 인물이 어떻게 힘겨운 삶을 걸어 나가는지, 사실 이 사건에 대해 90% 이상은 편견 섞인 시선으로 바라볼 텐데 그걸 어떻게 감내하고 대처해 나갈지가 제 관심을 끌었죠."

예수정/엣나인필름 © 뉴스1

예수정은 영화 '69'세 가진 의미에 대해서도 찬찬히 얘기했다.
"노령사회가 다가오지만 우리가 여러 작품 속에서 만난 노년의 삶은 대게 집단화된 이야기였어요. 현실감이 사실 떨어지는 얘기입니다. '69세'는 사건 자체는 특수하지만, 삶을 대하는 모습은 오히려 지극히 일반적인 노년의 모습을 다루고 있어요. '노년'이라는 것이 가보지 않은 길이지만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길이에요. 우리 미래의 모습이죠. 하지만 미래 모습이 특수한 집단의 시선으로만 그려지는 건 정말 아닌 것 같아요. 노년의 삶을 그릴 땐 면밀한 시선으로 그려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감독은 일반적인 노년의 삶을 밀도 있게 담아냈어요."


영화 속 효정은 성폭행 피해자다. 하지만 거세게 흔들리는 모습보다는 묵묵히, 용기 있는 걸음을 내딛는다. 표정의 변화도 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의 단단한 면모도 엿보인다.

"69세 정도가 되면 여성이라는 성별을 잃어버리기 쉬워요. 69세도 성별이 존재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성폭행을 당합니다. 성폭행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행위예요. 의도가 끔찍하고 나쁘죠. 사실 효정이 피해자로서 그 이야기를 스스로 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려웠을 거예요. 여성이자 노인으로서 당연히 망설이게 되죠. 그나마 남은 용기를 내서 말했더니 피해자에 대한 편견 있는 시선은 뒷걸음치게 만들기도 해요. 패배가 확실한 전쟁에 나간 군인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친구 동인이 준 용기, 또 다른 성폭행 피해자와 스쳐 지나가는 모습 등은 효정에게 연대의 힘을 줍니다. 한 명의 친구든, 자식이든, 부모든 다른 존재와의 연대감이 한 발 내딛게 해 준 거죠. 그 모티브가 참 좋았어요."

이렇듯 영화는 노년 여성과 성폭행이라는 소재를 통해 사회적인 메시지를 강하게 담아낸다.

예수정은 "사회적인 작품을 좋아하는데, 작품을 통해 사회의 어지러진 모습을 보고 뭔가를 조금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사회의 엄청난 편견이 살짝 아주 살짝이라도 흔들릴 여지가 있어 좋아요"라며 "세금 내듯이 하는 거죠"라고 했다.

예수정/엣나인필름 © 뉴스1

노년 여성이 단독 주연으로 나선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이 영화가 실제 영향을 얼마나 미칠지는 모르겠지만 시작점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하하. 우리 사회에서 69세 정도의 여성은 할 말 하면 욕먹는 세대죠. 알아서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로 있어야 해요. 이러한 입장에 놓인 인물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려냈어요."

현실적인 노년의 모습을 그려낸 예수정은 "우리가 정말 모르는 세계니, 노년에 대한 편견이 있을 수 있을 거예요"라며 "작품을 통해 편견이 없어지진 않더라도, 편견이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그러면 노년이라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나이 드는 것에 대해선 다들 미리 걱정할 필요도 없어요"이라며 "자신의 나이를 충분히 살다 보면 70세 즈음엔 그때 맞는 삶의 태도가 완성될 것인데, 나이 듦을 '가지 않은 길'이기에 재미나고 신비로운 것으로 봐주셨으면 합니다"라며 웃었다.

예수정은 현재 사회의 어른으로서 보여줘야 할 노인의 모습에 대한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둘러보면 참 화낼 일이 많아요. 제가 생각하는 어른의 개념은 두 가지입니다. 적어도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고, 내 삶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죠. 거기에 더 나아가 사람을 포용하는 것이죠. 그것까진 아니더라도 피해는 덜 줘야 합니다."

예수정/엣나인필름 © 뉴스1

연극 무대부터 영화, 드라마까지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온 예수정은 어느덧 연기 인생 40년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는 "연기가 너무 좋아요"라며 "날마다 삶의 현장에 있는 것 같죠"라며 미소를 지었다.
"배우라는 직업에 정말 만족해요. 배우를 하다 보면 각양각색 삶을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요. 한창 연극을 하다 힘들 때는 돈 때문에 그만두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어떤 작품을 제안받고 다시 시작했어요. 본능을 속일 수는 없었죠. 앞으론 무례한 행위를 하는 이들을 가차 없이 잡아들이는, 그런 역할도 해보고 싶어요. 망설임 없이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하."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