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인택 시대 논설위원
"이 상을 한국, 그리고 곳곳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드린다.(This is for Korea and Koreans everywhere.)"
한국계 캐나다인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애니메이션 연출가 메기 강 감독이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밝힌 수상 소감이다. 그가 구상하고 공동 연출한 K-팝 소재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는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에서 오스카를 안았다.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인 '골든'까지 주제가상을 받으면서 '케데헌'은 2관왕에 올랐다.

이날 강 감독은 "'저와 닮은 분들'이 주인공인 이런 영화가 나오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미안하다"라는 말로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객석에서 눈물을 훔치는 한국계 영화인의 모습도 카메라에 잡혔다. 이민 생활에서 겪었던 아시아, 특히 한국 문화에 대한 현지의 몰이해나 오해를 나타내는 말로 읽힌다. 하지만 이어서 한 "그러나 해냈다"는 말로 한국계 영화인으로서 성취감과 자부심을 드러냈다.


강 감독의 수상 소감은 한국계 이민자로서의 정체성과 한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또렷하게 보여줬다는 점에서 깊은 울림을 남겼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5살 때 캐나다로 이민을 갔지만 평소 자신을 '강민지'로 소개하고, "내 내면은 100%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등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자랑스러워했다.

특히 한국 문화의 정서가 국경을 넘어 전 세계인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K-팝과 한국문화를 소재로 '케데헌'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현대 한국과 한국 문화를 정확하고 세밀하게 묘사해 감탄을 자아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 문화의 경쟁력을 믿고 이를 글로벌화하는데 진심이었던 셈이다. 작품이 흥행에 성공하고 글로벌 팬들이 주제가 등에 등장하는 한국어 가사를 그대로 따라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전율했다는 일화도 이를 잘 드러낸다.

아울러 작품 속에서 한국 여성 캐릭터를 정형화된 모범생으로 그리지 않고 인간적인 모습 그대로 생생하게 묘사한 것도 많은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할리우드 영화에 흔히 나타나는 동아시아인, 특히 한국인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을 무너뜨린 셈이다. 대신 개성과 결점을 가진 현실적 인물로 구현했다. 한국 출신의 문화적 자부심,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담은 것이다. 이날 수상 소감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든 것도 이런 진솔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골든'을 부른 한국계 미국인 가수로 공동 작사·작곡가인 이재의 수상 소감 역시 비슷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어린 시절 K-팝을 좋아하는 저를 사람들이 놀렸지만, 지금은 모두가 우리의 노래를 부른다. "
다만 공동 연출자 크리스 아펠한스 감독의 수상 소감은 조금 다른 결을 보여준다.
"음악과 이야기에는 문화와 국경을 초월해 우리를 연결하는 힘이 있다."

강 감독과 이재가 K-팝과 한국인, 또는 아시아인의 문화가 변방에서 중심으로 자리를 옮겼음을 강조했다면, 아펠한스 감독은 문화권 간의 소통과 '문화적 혼종(Cultural Hybridization)'에 좀 더 무게를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류, 특히 K-팝을 한국문화의 전지구적 파급으로 보는 입장과, 한국문화와 다양한 문화간 혼종의 산물로 보는 시각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차이는 하버드대 영문학 교수인 마틴 푸크너가 설파한 '문화를 보는 두 가지 렌즈'를 떠올리게 한다.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Culture: The Story of Us, From Cave Art to K-Pop)』라는 책에서다. 바로 '정체성'과 '보편성'이다.
문화연구에서 정체성은 '민족(공동체) 문화' '전통 문화' '고유 문화'라는 말로 주로 설명된다. 문화를 내부 소속인의 공동 자산이자 고유의 소유물로 간주하는 개념이다.
보편성이라는 개념에서 보면 문화는 특정 집단이 아닌 인류 전체의 소유물이다. 서로 교류하고 접촉하면서 시너지를 얻어 생긴 혼종의 산물이 문화라는 입장이다. 서로 다른 요소·문화·인간집단이 혼합·융합·교배돼 완전히 새로운 형태나 제3의 산물, 또는 특성을 만들어내는 것을 혼종이라고 부른다.

전 세계 팬들에게 다가가고 있는 K-팝은 한국문화의 저력과 전통이라는 정체성과, 고유 문화가 외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생긴 보편적인 혼종의 힘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가사에 한국어와 영어가 섞이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이유일 것이다. 이제 K-팝은 특정 국가의 문화라기보다 인류의 문화적 성취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푸크너 교수도 "서구의 록, 미국 흑인에서 비롯한 재즈, 자메이카의 레게, 아프리카계 미국문화에서 비롯한 아프로 비트 등이 자연스럽게 뒤섞인 것"을 K-팝 파급력의 원천으로 꼽았다. 그러면서 K-팝이 한국 생활문화의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해 미국 팝과 랩에선 지나칠 정도로 흔한 폭력·외설·약물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도 경쟁력으로 꼽았다.

결국 교류·소통·혼종을 이끈 한국문화의 개방성과 포용성, 그리고 전연령층이 즐길 수 있는 '깨끗한 콘텐츠'가 K-팝 세계화의 동력이 됐다고 할 수 있다. 문화에서 개방과 소통의 힘을 이처럼 잘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까. K-팝의 문화적, 산업적 성공은 '자유방임형 글로벌화'의 산물이다. 정치나 권력이 깊이 개입하지 않은 환경이 창작자들의 자유로운 실험과 글로벌 진출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K-팝의 성공은 문화가 국경을 넘어 어떻게 확장되는 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사례다. 하지만 성공이 영원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적 색채를 지키면서도 세계와 더 자유롭게 섞이고, 끊임없이 변주하는 것. 바로 그 역동성이 앞으로도 그 생명력을 결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