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 거창한 시대정신을 설파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이 질문을 회피하는 순간, 시대는 우리를 앞질러 가고 우리는 그저 떠밀려 다니는 존재로 남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시대에 발붙이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가장 생생하게 담아내는 통로는 결국 언론이다. 전통 있는 서구 유력 매체들이 저마다 'Times'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언론이 시대라는 큰 그릇을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거대한 흐름을 좇고, 그 안의 사람들과 호흡하며, 복잡한 항로를 찾아내는 일. 그것이야말로 언론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오늘의 시대는 분명 속도가 지배한다. 가히 초가속의 시대라 할 만하다. 기술은 예고 없이 일상을 바꾸고, AI를 비롯한 혁신은 인간의 판단 영역마저 흔들고 있다. 언론 역시 이 예측하기 힘든 물결의 한복판에 서 있다. 어쩌면 가장 먼저 존재의 시험대에 오른 영역일지도 모른다. 온갖 연결망을 통해 정보는 끝없이 유통되지만, 의미는 점점 얇아지고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희미해졌다. 말초적 흥미를 자극하는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건강한 공론의 장이 갈수록 황폐해지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를 둘러싼 냉엄한 현실을 떠올리면 그 위기감은 더욱 커진다. 구구절절 언급하지 않더라도, '힘의 논리'가 압도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국가 간 생존 경쟁은 이미 사활(死活)이 걸린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어떻게 생존의 길을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외부 환경의 압박은 결국 우리 사회 내부의 의사결정 방식과 공론의 질을 정면으로 시험하고 있다.
불안과 혼돈의 시대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출발점은 의외로 단순하다. '존중받는 개인, 부강한 대한민국'이라는 공통의 가치다. 이에 대한 답을 함께 찾아 나갈 수 있는 건강한 공론장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시대>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숙의 미디어'를 표방하며 이 길에 나선 이유이기도 하다.
존중받는 개인을 우선에 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강해지기 위해 개인의 존엄이 희생되어도 된다는 발상은 종종 달콤한 유혹처럼 등장했지만, 역사적으로 성공한 적은 없다. 개인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책임 있는 시민도, 창의적인 기업도, 지속 가능한 번영도 기대하기 어렵다.
'국연(國緣)'이라는 말이 있다. 한 나라를 삶의 무대로 공유하게 된 인연이다. 이 인연은 감상적인 애국심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이해관계, 궁극적으론 생존 문제와 직결돼 있다. 나라가 흔들리면 개인의 삶도 함께 흔들린다. 때론 외부 침략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반면 국가의 부강은 기업과 시장, 그리고 개인의 역동성으로 귀결되고, 행복의 경제적 기반 역시 그 위에서 다져진다.
문제는 이 복잡한 관계를 어떻게 조정하고 설계할 것인가다. '존중받는 개인, 부강한 대한민국'이라는 공공선의 가치를 중심에 두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함께 논의하며 답을 찾아가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그것이 바로 숙의의 길이다. 공동체 발전에 실질적으로 보탬이 될 국가 어젠다, 제도 개선 이슈가 한둘이 아니다. 정치권, 시민사회, 학계, 언론이 각자의 자리에서 깊이 연구하고 대안까지 함께 모색한다면 우리의 내적 역량은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반대로 숙의를 포기한 사회는 힘의 논리로 회귀한다. 숫자와 세력, 목소리의 크기로 결론이 정해지는 사회다. 그 대가는 언제나 개인의 삶으로 되돌아온다.
시대와 동행한다는 것은 유행을 좇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를 이끌거나 가르치려는 오만도 아니다. 언론이 시대를 규정할 수는 없지만 시대의 흐름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는 있다. 시대의 주체는 사람이다. 그들과 함께 걷고, 시대의 과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되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것. 그 속에서 공존의 길을 찾는 것. 그것이 오늘 언론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가장 무거운 질문이자 숙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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