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책위)는 지난 19일 제 5차 회의를 열어 고려아연 등 13개사 주주총회 안건에 대한 의결권 행사 방향을 심의하고 결정했다. 국민연금은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과 황덕남, 박병욱 이사 후보 선임 안건에 대해 의결권을 미행사하기로 결정했다. 김보영, 이민호 감사위원 후보 선임은 반대하기로 했다. 수책위는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권익의 침해 이력이 있는 자 등에 해당해 '미행사' 내지 '반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경영권 분쟁을 겪고 있는 고려아연에 대해 국민연금이 사실상 현 경영진 안건을 반대한 것으로 풀이된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말 기준 고려아연 지분 5.2%를 보유한 대주주로 이번 고려아연 주총에서 캐스팅보트(최종 결정권) 역할이 유력하다.
일각에서는 국민연금의 미행사 결정을 두고 한국형 기업 거버넌스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분석이 나온다. 수책위는 재무제표 승인과 배당안에는 찬성하며 현 체제의 경영 성과를 인정했음에도 그 성과를 이어갈 인적 구성인 이사 선임에는 침묵했다. 이러한 '선별적 의결권 행사'는 지배구조 일관성을 저해하고 시장의 불확실성을 가중시킨다는 지적이다.
금융투자업계와 거버넌스 전문가들은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 책임 원칙)의 본질이 단순히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기업 가치의 장기적 증대'를 위해 명확한 입장을 견지하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갈등이 첨예한 사안마다 의결권 행사를 유보하는 행태는 사실상 대주주로서의 책임을 스스로 마비시키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이다.
특히 안정적인 경영권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주주 환원 정책은 '사상누각'에 그칠 수 있음에도 이를 분리해서 판단한 것은 전략적 오류라는 지적도 있다.
이번 사례는 국민연금 의결권 결정 구조의 독립성과 전문성에 대한 의구심을 다시금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시각이 많다. 정무적 판단이나 부분적 지표에 매몰되어 실질적인 기업 가치 평가나 종합적인 판단을 놓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캐스팅보트를 쥔 국민연금이 종합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결정을 유보하는 것은 혼란을 방치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며 수탁자로서의 기업의 장기적 성장과 안정을 넘어 분쟁 당사자들에 대한 ESG적인 종합적 판단을 하는 것이 책임있느주주로서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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